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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

후배 녀석이 7년 넘게 사귄 여자와 실컷 싸우고 헤어졌다.녀석은 그녀를 잊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지인들과 술을 마셨는데 (정확히 말하면 내게 술을 사 달라고 했다.) 얼큰하게 취하고 나서는 옛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만고 불변의 진리가 떠오른다. 늘 술이 문제다. 중요한 건 평소 문학이나 드라마와는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는 거다. "선배, 우린 목적지 없이 여행길에 올랐던 것 같아요. 목적지 없이...." 녀석의 표현이 그랬다.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종착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두람ㄴ의 여행을 떠났으나, 어디선가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길을 잃었노라고 그러면서 녀석은 "괜찮아요 곧 잊을테죠 곧 잊을 테죠..."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전두엽이 잘려..

2017. 8. 29. 18:28

도전

도전은 인생을 흥미롭게 만들며, 도전의 극복이 인생을 의미 있게 한다. Challenges are wha make life interesting; overcoming them is what makes life meaningful. - 조슈아 J. 마린 Joshua. Marine -

언어의 온도 - 당신은 5월을 닮았군요.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난 계절의 영왕으로 불리는 5월을 가장 좋아한다.5월의 속성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라다'가 아닐까 싶다. 5월을 뜻하는 메이May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와 증식增植의 여신 마이아Maia에서 왔다. 5월이 되면 모든 게 쑥쑥 자란다. 들파느이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고 사람의 감정도 충만해진다. 몇 해 전 5월, 한 여인을 향해 내 안에 숨어있던 수줍으 목소리를 끄집어 냈다.그 고백은 햇빛이 못 미치는 우물 속 깊은 곳에서 순수한 수맥水脈을 퍼 올리는 일 처럼 조심스러웠다. 난 은밀하게, 섬세하게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표현을 고르고 고른 끝에 "사랑해요" "좋아해요" 같은 말 대신 "당신 정말이지 5월을 닮았군요"하고 마른 침을 삼키며 고백했다. 물론 이는 영화 ..

언어의 온도 -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업무 때문에 파주출판도시에 다녀왔다. 그곳 초입을 지날 때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몇 해 전, 봄을 알리는 비가 지나간 스산한 저녁이었다. 출판도시에서 일을 보고 차를 몰아 자유로에 진입했다. 어지롭게 널린 파편 사이로 찌그러진 승용차 몇 대가 보였다. 추돌사고가 발생한 듯 했다. 맨 앞 차량에서 허리가 조금 굽은 어르신이 걸어 나와서는 다른 차량 운전자와 잠깐 얘기르 나눈 뒤 곧장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승용차의 파손 사앹는 살피지도 않았다. 더 시급한 것이, 아니면 더 소중한 것이 있었던 거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건 그 다음 장면이다. 어르신이 내린 차량의 뒷자석에서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뒤 어르신은 문을 열어젖힌 다음 두 팔을 벌려 ..

언어의 온도 - 그냥 한 번 걸어봤다.

버스 안에서 일흔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매만지며 '휴~'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을 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창밖 풍경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 쯤 지났을까, 어르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우연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 했다. "아비다. 잘 지내? 한번 걸어봤다...." 대개 부모는, 특히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는 "한 번 걸었다"는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정말 일상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보는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리 없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

언어의 온도 - 말의 무덤, 언총

그런 날이 있다. 입을 닫을 수 없고 혀를 감추지 못하는 날, 입술 근육 좀 풀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날. 그런 날이면 마음 한 구석에서 교만이 독사처럼 꿈틀거린다. 내가 내뱉은 말을 합리화 하기 위해 거짓말을 보태게 되고, 사앧의 말보다 내 말이 중요하므로 남의 말꼬리를 잡거나 말 허리를 자르는 빈도도 높아진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지는 이른바 다언증多言症이 도질 때면 경북 예천군에 있는 언총言塚이라는 '말 무덤'을 떠올리곤 한다. 달리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을 파묻는 고분이다. 언총은 한마디로 침묵의 상징이다. 마을이 흉흉한 일이 휩"싸일 때마다 여러 문중 사람이 언총에 모여,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말과 "그쪽 걱정돼서 하는 얘기인데요...."처럼 ..

언어의 온도 - 틈 그리고 튼튼함

대학 때 농활(농촌 봉사활동)을 갔다가 작은 사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석탑 하나가 기품을 뽐내며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난 탑 주변을 빙빙 돌며, 돌에 새겨진 사엋와 흔적을 살폈다. 얼핏 봐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석탑이었다. 세월과 비바람을 견딘 흔적이 역력했다.'몇 살쯤 됐을까?'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조용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얼마나 됐을 것 같나?" 주지 스님인 듯 했다. 그는 하루에도 서너 번식 마주치는 옆집 아이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듯 편안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석물石物은 수백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야. 참, 이런 탑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 "네? 틈이라고 하셨나요?" "..

언어의 온도 - 사랑은 변명하지 않는다.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는 말이 있다. 좌우, 그러니까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잘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일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얼마 전 5호선 공덕역에서 생각지도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소한 장면 하나가 내 마음에 훅 하고 들어왔다. 퇴근 시간, 콩나물시루 같은 전동차에 가까스로 몸을 밀어 넣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빈자리가 없었다. 승객들을 둘러봤다. 절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전화를 걸거나 동승한 사람과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경로석에 앉은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할머니 옆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제법 시끄러웠다. 게다가 어르신은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