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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법

영화 '종이 달'의 주인공 리카는 평범한 은행원으로 일하며 조금은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에서 충동적으로 화장품을 구매한 그녀는 얼떨결에 고객 예금에 손을 대면서 걷잡을 수 없는 나락에 빠진다. 아슬아슬한 일탈을 이어나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종이 달'은 무슨 뜻일까 과거 일본에 사진관이 처음 생길 무렵,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매단 채 한껏 폼을 잡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종이 달은 가족이나 연민과 보낸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횡령한 돈을 흥청망청 쓰고 집으로 향하던 리카가 새벽하늘에 걸려 있는 초승달을 지그시 바라보는 순간이다. 이는 관객들에게 '훔친 돈'으로 누리는 행복도 행복일까, 가짜 행복일까?"라는 질문을 더..

진짜 사과는 아프다.

" 한기주 씨!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 드라마 "파리의 연인" 中 언젠가 별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다가 이 장면에서 속이뜨끔했다. 화해의 제때 내밀지 않고 자존심만 세우다 갈등의 앙금을 남긴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기자 시절 사소한 다툼으로 불편하게 지냈던 선배가 있었다. 토라지기 전에는 꽤 돈독한 사이였지만, 자존심 탓인지 먼저 잘못을 시인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그 선배도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기자실에서 마주친 선배는 빨간 사과 한 알을 건네주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선배의 얼굴과 사과의 색깔이 꽤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을 삐쭉 내밀며 잠시 사과를 바라봤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각사각 한입..

길 가의 꽃

오래전 기억이다. 점심ㅇㄹ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직장 동료가 회사 앞 화단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쁜데, 오르 조금만 꺾어 갈까?" 그거 꽃을 낚아채려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아니, 뭣들 하는 건가? :꽃을 왜 꺾어?"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한 송이만 꺾어 갈게요." "그냥 지나가며 보도록 하게." "네? 왜요?" "이 꽃은, 여기 이 화단에 피어 있어서 예쁜 건지도 몰라. 주변 풍경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이 반감될 걸세. 그러니 꺾지 말게. 책상 위에 올려놓는 꽃은 지금 꽃과 다를 거야."

부재의 존재

한적한 바닷가에 있ㄴ든 작은 마을 가마쿠라에서 평범한 일상을 꾸련아가는 세 자매는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부고 소식을 접한다. 자매는 아버지와 불륜을 저지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스즈와 어색하게 대면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 장례식에서, 아, 이 무슨ㄷ 황당한 시추에이션인가. 하지만 자매는 나이에 비해 의젓한 스즈를 보는 순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갖3ㅗㄱ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스즈, 우리 함께 살지 않을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갯내음이 가득한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서로를 다독이며 해옵ㄱ을 찾아가는 네 자매의 사연을 그렸다. 영화엔은 유독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유가 있ㄴ다. 자매가 즐겨 먹는 멸치 덮밥,..

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

후배 녀석이 7년 넘게 사귄 여자와 실컷 싸우고 헤어졌다.녀석은 그녀를 잊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지인들과 술을 마셨는데 (정확히 말하면 내게 술을 사 달라고 했다.) 얼큰하게 취하고 나서는 옛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만고 불변의 진리가 떠오른다. 늘 술이 문제다. 중요한 건 평소 문학이나 드라마와는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는 거다. "선배, 우린 목적지 없이 여행길에 올랐던 것 같아요. 목적지 없이...." 녀석의 표현이 그랬다.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종착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두람ㄴ의 여행을 떠났으나, 어디선가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길을 잃었노라고 그러면서 녀석은 "괜찮아요 곧 잊을테죠 곧 잊을 테죠..."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전두엽이 잘려..

언어의 온도 - 당신은 5월을 닮았군요.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난 계절의 영왕으로 불리는 5월을 가장 좋아한다.5월의 속성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라다'가 아닐까 싶다. 5월을 뜻하는 메이May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와 증식增植의 여신 마이아Maia에서 왔다. 5월이 되면 모든 게 쑥쑥 자란다. 들파느이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고 사람의 감정도 충만해진다. 몇 해 전 5월, 한 여인을 향해 내 안에 숨어있던 수줍으 목소리를 끄집어 냈다.그 고백은 햇빛이 못 미치는 우물 속 깊은 곳에서 순수한 수맥水脈을 퍼 올리는 일 처럼 조심스러웠다. 난 은밀하게, 섬세하게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표현을 고르고 고른 끝에 "사랑해요" "좋아해요" 같은 말 대신 "당신 정말이지 5월을 닮았군요"하고 마른 침을 삼키며 고백했다. 물론 이는 영화 ..

언어의 온도 -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업무 때문에 파주출판도시에 다녀왔다. 그곳 초입을 지날 때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몇 해 전, 봄을 알리는 비가 지나간 스산한 저녁이었다. 출판도시에서 일을 보고 차를 몰아 자유로에 진입했다. 어지롭게 널린 파편 사이로 찌그러진 승용차 몇 대가 보였다. 추돌사고가 발생한 듯 했다. 맨 앞 차량에서 허리가 조금 굽은 어르신이 걸어 나와서는 다른 차량 운전자와 잠깐 얘기르 나눈 뒤 곧장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승용차의 파손 사앹는 살피지도 않았다. 더 시급한 것이, 아니면 더 소중한 것이 있었던 거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건 그 다음 장면이다. 어르신이 내린 차량의 뒷자석에서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뒤 어르신은 문을 열어젖힌 다음 두 팔을 벌려 ..

언어의 온도 - 그냥 한 번 걸어봤다.

버스 안에서 일흔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매만지며 '휴~'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을 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창밖 풍경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 쯤 지났을까, 어르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우연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 했다. "아비다. 잘 지내? 한번 걸어봤다...." 대개 부모는, 특히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는 "한 번 걸었다"는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정말 일상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보는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리 없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