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고통과 탐색의 시간 - 나, 우리 가족 그리고 한인 공동체 (6)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음악과 병행하여 나는 집 근처 발레학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발레레슨을 받았다. 발레리나 동생을 둔 어머니는 발레가 어린아

이의 자세와 우아한 몸짓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발레학원 원장이자 강사인 부부는 뉴욕시티발레단이 운영하는 공식 발레학교인 아메리칸발레학교 출신의 무용수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부모님과 링컨센터에서 열린 뉴욕시티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가싿. 도심으로 이어지는 교통이 혼잡했던 데다가 비싸지 않은 주차장을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15분 늦게야 공연장에 도착햇다. 한 번 음악이 시작되면 그 곡이 끝나고 새 곡이 시작되기 전에만 공연장 입장이 허락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엘리베이터에 설치된ㅇ 스피커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악보에 맞춰 오케스트라가 씩씩하게 연주하는 ㅁ<소곡>이 흘러나왔따.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면 공연에 대한 기대와 제때 도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답답함, 빨리 공연을 보고 싶은 간절함에 휩싸여 허겁지겁 서두르던 일이 생각난다. 소중한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안절부절 못하던 그때가 떠오르며 몸이 부르르 떨린다.


 무용수들의 완벽하게 날렵한 몸매, 흠잡을 데없는 복잡한 무용 스텝, 어린 시절의 호나상을 구현하는 숨 막히는 장면들, 그리고 코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장관에 나는 넋이 나갔다. 무대에선 어린이 무용수도 제법 많았는데, 굉장히 재미난 것처럼 보였다. 프로그램 팸플릿에는 그 아이들은 아메리칸발레학교, 줄요서 'SAB'라 불리는 무용학교의 학생들이라 했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무대 위에 날리는 눈꽃과 유정의 아름다움은 잊혀졌다. 대신 이 중요한 정보가 나의 뇌리에 가시처럼 깊게 박혔다.


 나는 링컨센터 무대에서 춤춘 어린ㅇ이들이 훈련을 받는다는 학교에 대해 알아내고자 퀸즈 공공도서관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내 또래 열 살배기 소녀를 다룬 [아주 어린 댄서]라는 흑백 사진지ㅏㅂ을 찾아냈다. 매일 SAB에 등교하는 소녀 스테파니의 일상을 기록한 채ㅑㄱ잉넜다. 발레 스튜디오는 거대한 창문ㅇ을 통해 빛이 들고 삼단의 발레 바가 벽을 두르고 있는 곳이었고, 절제미가 돋보이는 무용 연습이 한참이었다.어린 아이들의 신체는 귀엽게 날"씬하고 유연했으며 팔다리는 인간답지 않게 길었따. 무리 중 특히 뛰어난 아이들은 여러 단계의 어린이반을 거쳐 훗날 뉴욕시티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했다.


 몇년 후에야 안 일이지만 [아주 어린 댄서]는 발레를 배우 내 또래 소녀들이 매료되어 사진을 보고 또 보며 SAB에 다니는 꿈을 꾸게 한 책으로, 내가 뉴욕에 오기 몇 년 전에 출간된 베스트 셀러였다. 이 책에서 스테파니는 SAB 친구들과 함께 뉴욕시티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의 아역 오디션을 본 후, 시즌 내내<호두까기 인형>의 어린 마리(<호두까기인형>의 여주인공)로 출연하게 된다. 예행 연습에 참여하고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는 소녀 스테파니를 통해 독자는 무대 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연습을 감독하고 의상까지 살피던 발레단장을 '미스터 B'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샴페인 잔을 발꿈치 옆에 올려놓을 수있을 정도로 발을 밖으로 틀어 앞으로 뻗으라던 내 발레학원 선생님의 말을 회상했다. 그땐 '미스터 B'가 한 말이라는 선생님의 언급에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런데 그 '미스터B'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미스터B라는 사람, 누굴까? 알아내야 했다. 나는 발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음, 미스터 B는 바로 조지 발란신이었다. 뉴욕시티 발레단의 창단자이자, 발레 애호가들의 큰 사랑을 받은 <호두"까기 인형> 등 발레단이 공연한 수많은 작품을 안무한 천재, 러시아 출신인 그는 소년 시절에 황실발레학교에서 수련한ㄷ 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해싿. 1930년대 유럽에서 발란신은 미국 유댁몌 백화점 사장의 아들인 젊고 부유한 하버드 졸업생 링컨 커스틴을 만나게 된다. 훗날 미국 예술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는 커스틴은 고전발레를 사랑하고 미국 발레의 전통을 세우는 것을 꿈 꾼 선지자적 인물이었다. 발란신의 발레를 접한 그는 자신의 재력과 인맥을 동원해 재정을 돕겠으니 미국으로 와 발레단을 세우자고 발란신을 설득했다.


 발란신은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교가 우선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발레학교는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어린 무용수들에게 발레 테크닉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학교가 없다면 미국 발레의 미래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1934년에 태어난 것이 아메리칸 발레학교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교가 우선이다." 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발란신이 그 말을 한지 정확히 50년 후, 퀸즈에 살던 열 한 살짜리 말라깽이 한인 이민자 소녀의 뇌리에 이 짧은 주문은 단단히 와 박혔다. 나는 미스터 B가 세운 학교의 학생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약가닝라도 짬이 나면 거실에 잇는 소파 등을 발레 바로 삼아 바렐 스텝과 도약, 회전과 점프를 연습했다. 부모님이 이젠 그만하라고 소리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세 딸의 막둥이인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됐을 즈음이었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 출산을 앞둔 엄마를 돕고 산후조리를 도와주기 위해 서울에서 외할머니가 오셔서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잇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외할머니가 매우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계셨다. 나쁜 일이 일어났나 싶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외할머니가 말했다. 내 심장은 잠시 덜컥, 멈췄다. "너희 엄마가 또 딸을 낳았구나. 운도 지지리 없지." 극도로 실망한 표정은 실로 진심인 듯했다. 새 생명이 태어난 데 대한 미소와 축하도, 산모와 아기가 건강한 것에 대한 안도의 표정도 없었다. 누가 보면 건다로가 놀아나다 달아난 말썽쟁이 딸에게 닥친 일얘기라도 하나보다, 생각할 법한 표정으로 외할머니는 동생의 탄생을 알렸다.


 그날 이후 항상 나는 막내만 보면 '너는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또 말해 주고 싶었다. 이제 매우 멋진 젊은 여성으로 성장한 우리 막내는 기운이 넘치는 활달한 미인이다. 내 딸은 우리 막내와 똑같이 닮았다.


 우리 가족의 휴가는 항상 똑같았다. 갈색 올즈모빌 스테이션 왜건에 끼어 탄 후 빙햄튼이나 버펄로, 보스턴 또는 시카고 등으로 장거리 운전을 해서 부모님의 대학교 또는 고등학교 동창ㄴ에 집에 놀러 가는 것이다. 한인 가족 여럿이 주말에 비좁은 숙소에 모여 항상 밤 늦은 시간까지 놀았다. 상기된 얼굴에 흰 런잉 셔츠 바람으로 카드를 치고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들이키는 아빠들, 야식으로 우동을 만드는 명랑한 엄마들, 그만 좀 뛰어다니라고 야단맞고는 한자리에 모여 마술 실력을 자랑하고 귀신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 모두들 웃고 있었다. 졸음과 싸우며 야식이나 죽을 홀짝거리다 부모님께 안겨 잠자리에 드는 기분은 정말 삼삼했다.


 우리 부모님은 활발한 사교활동을 하였고, 뉴욕의 번성하던 모임 여러 군데에 속해 있었다. 모두 한인모임이엇다. 아버지와 절친한 서울대 동창들 대부분처럼, 어머니와 아주 친한 이화여대 동창들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자녀들 나잇대도 비슷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동창과 그 가족들, 어머니의 동창과 그 가족들의 집을 차례로 돌며 한 달에 한번씩 모였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하는 부모님은 행복해 했고 항상 웃고 있었다. 낯선 나라로의 이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젊은 시절의 친구들과 나누던 깊은 우정은 인상적이었으며, 다시 뿌리내리고 적응하는 삶의 모범이라 할 만했다.


 한인교회는 미국의 한인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 부모님도 교회를 중요시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맞는 한인교회를 찾아다녔다. 교회가 하나밖에 없던 영스타운과는 달리, 뉴욕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풍부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요일마다 '교회 쇼핑'을 다녓다. 한 군데씩 찰몌대로 한인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뒤 이은 친교 시간에 참여하면서 뉴욕의 다양한 한인사회들을 맛보았다.


 결국 어머니의 최종 선택을 받은 교회는 카리스마 넘치는 복음주의 목사님이 이끄는 매해튼의 한인교회엿는데, 수천 명의 신도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수년간 매우 다양항 활동과 프로젝트에 시간과 힘을 보태며 교인사회의 활발한 일원이 되었다. 때때로 신도들은 우리 집에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어머니의 강권에 아버지는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종교모임에 나가기만 하면 졸던 아버지는 용감하게 졸음과 싸웠고,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아버지는 과학인, 아니 심지언은 골프인이라고 해도 될 법하지만, 종교인이라기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적어도 타고난 종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교회활동의 일환으로 나는 여름성경캠프에 갔따. 친구들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다들 방언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질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 성경 선생님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캠프는 아무래도 나와 신과의 유대가 형성될 곳은 아니었던 듯 싶다. 오히려 기회는 다른 곳에 널려 있었다. 나는 교회의 아름다움과 금욕적 고결함을 사랑했고 음악과 각종의 의례와 기도문을 사랑했다. 천주교도인 할머니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영향일 수도 있으리라. 다수의 한인교인사회의 특징인 복음주의적 성향은 내 성정과 딱 맞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의 수많은 한인들에게 한인교회는 영적이나 공동체적인 면에서 매우 깊이 있고 생생한 경험을 선사했고,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하는 날이었다. 교회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부모님의 친구들과 함께 언제나 같은 한국 음식점에 가는 습관이 있었다. 맨해튼 섬 전체에 한국 음식점이라고는 고작 두엇일 때부터 생긴 습관이엇따. 한국 음식점은 지금은 물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는 동안 퀸즈의 한인들이 플러싱(뉴욕의 한 구역으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 밖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노던 블러바드(플러싱 한인상권의중심 거림)를 따라 롱아일랜드(퀸즈와 인ㅇ접한 행정구역, 부촌으로 유명하다)까지 한글 간판을 자랑하며 죽 뻗어 있는, 그리고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는 상가들이 그 증거다. 맨해튼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이 바로 소설의 주인공들, 개츠비와 데이지, 톰, 닉이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에서 도심으로 운전하고 들어가던 구역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는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가상의 지역으로, 이스트에그는 '올드머니'인 세습부자를 웨스트에그는 '뉴머니'라 칭해지는 신흥부자를 대표하는 지역)


 갈비와 설렁탕 메뉴로 식사를 한 후에 우리 가족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향하는 곳은 유니온 스퀘어 근처의 대형 서점 반즈앤노블이었다. 아버지가 최신 의학서적을 훑는 동안 나머지 가족은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몇 시간을 즐겼다. 나는 언제나 예술과 발레 관련의 대형 사진집이 모여 있는 서가 아니면, 화가와 음악가, 무용수들의 전기가 꽂힌 서가 사이에 콕 박혀 있었다. 우리에게 서점은 꿈의 장소였지만 '구매'의 장소는 절대 아니었따. 그래서인지 집에 책이 잔뜩 있음에도 서점에 갈 때마다 책을 몇 권씩 사달라고 조르는 내 아이들이 나는 무척 놀랍다. 나는 아이들이 조르는 대로 들어준다.


 미국에 온 지 5년 후 우리 가족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동생과 나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지어내며 놀앗따. 마치 미국에서의 미래가 그 이야기대로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조각조각 부서진 과거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 부모님은 한국 정부가 어린이 및 십대 초반의 청소년들을 위해 한국에서 개최하는 캠프에 우리를 보냈다. 캠프의 목적은 미국으로 이민 간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일정 기간 동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익히게 하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의 답사도 시키기 위함이었다.

커다란 교실 벽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거대한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나이든 선생님들 우리에게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우리가 옷 입는 방식도 마뜩치 않아 했다. 한국인 선생님과 교포 학생 사이의 골은 깊고 깊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않는 날에는 커다란 고속버스를 타고 군인들의 관리 하에 갖가지 명소를 방문했다. 명소에는 비무장지대도 포하마되어 있었다. 윌 부모님은 그 철책선이 쳐진 분계선을 넘어 또 하나의 쌍둥이와 같은 북한 땅에서 남하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그 선을 건넜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는 소냐였다. 퀸즈의 세탁소 딸인 소냐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아르메니아인이엇따. 이런 종류의 사업을 했던 다수의 이민자들처럼, 소냐의 부모도 모국에서는 고학력의 소유자였다. 나는 단정하고 예의바른 외양 아래 폭발적인 창의력과 엄청나게 엉뚱한 성격을 품고 있는 소냐에게 끌렸다. 타기군인들이 아르메니아인의 배를 갈라 죽였다는 무시무시한 일화를 유머를 섞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가 소냐였다. 우리는 마이클 잭슨과 보이 조지의 립싱크를 하며 몇 시간이나 놀앗고 공을 들여 미래의 계획을 짜기도 했다. 소냐는 스타가 되고 나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광팬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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