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어린시절 (1)
" 아마도, 우리의 유년 시절에서 가장 충실하게 산 날은 우리가 쓸데없이 소일했다고 믿는 그런 날일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보낸 그런 날." - 마르셀 프루스트 -
/ 어린 시절 /
우리 부모님은 이북 출신이다. 부모님이 어릴 때 한국 전쟁이 터졌고, 평양에서 살던 친가와 개성과 원사넹 뿌리를 두었던 외간느 각자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향했다. 1951년 1월 어머니는 두 살, 아버지는 세 사링었다.
아버지는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미는 태어나기 전에 손위 오라버니 둘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장녀가 되었다. 죽은 오라비의 유지를 이으라는 뜻이었는지, 증조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성남'이라는 남자 이름을 지어 주었다.
친가는 지주였다. 친가는 1948년 북한에 세워진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했다. 그 이전에 친가는 소유 농토에서 부리던 일꾼들로부터 저택과 토지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은 적이 있었따.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가지고 있던 토지에서 쫓겨난 일가족은 친척에게 얹혀살게 되었다.
친할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공개적으로 남한을 지지하였고 맥아더 휘하 유엔군의 평양 점령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ㅎ그러나 몇 달 후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참전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유엔군이 후퇴하였다. 공산체제 하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친가 일가족은 백만 피난민의 행렬에 가담했다.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의 비참한 피난ㅇ길, 폭격의 와중에 돕조로 남하하던 피난민의 거대한 인파에 증조할머니가 휩쓸려 실종되었다. 가족들은 고함을 치며 찾아 해맸지만 끝내 못 찾았고 두 번 다시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ㅏ. 아기였던 고모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할머니의 등에서 얼어 죽었다. 살아남은 가족은 계속 움직였고, 아기의 시신은 제대로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차갑게 언 채로 길에 쌓인 다른 시신들과 함께 뒤에 남겨졌다.
다시는 보지 못할 고향과 친척, 영원히 남의 것이 된 토지와 사회적 지위를 뒤로하고 친가는 서울에 자리 잡았다. 슬픔에 잠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생활은 매우 곤궁했다.
자그마하게 꾸려나가던 장사마저 기울자 일가족은 형편이 나았던 친척을 찾아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즈음 서울고등학교에 합격한 아버지만 서울에 남았다. 가족이 다시 모여 살게 된 것은 아버지가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때였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외가는 외국 회사들을 상대로 무역사업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많은 한국인들이 그랬뜻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학교 교육을 받아 일본어에 능통했다. 외가 또한 친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전ㅇ쟁이 깊어지면서 북한에서는 안전ㅇ하지 못할 운명임을 깨달았다. 이미 관공서가 필요하다는 구실을 대며 외가의집을 뺏앗아간ㅇ 북한 정부였다. 친가가 도보로 평양에서 탈출한 바로 그 달에 외가 역시 피난민이 되어 원산에서 미 군함을 타고 탈출하였따.
서울에 자리를 잡은 외할아버지는 버스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구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2남 3녀의 장녀였던 어머니는 고용인과 수입품이 그득한 저택에서 풍요롭고 편안한ㄷ 생활을 누렸다.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통학하던 어머니는 학교 건물이 보이기 전에 내려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전후 곤궁하게 살고 있는 학교 친구들에게 외제 랜드로버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어머니가 가난한 친구들의 눈을 피해 차에서 몰래 내리는 모습이 내게는 빈곤에 허덕이던 전후 한국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어먼이가 대학생이던 1960년대 말, 급격하게 기울던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파탄났다. 다시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의 월급쟁이가 되었고, 온 가족은 검소하게 살았다. 이따금 외할아버지는 무리해서 피자나 햄버거 같은 미국 음식을 사오곤 했다고 한다ㅏ. 당시의 서울에서는 귀한 음식이었따.
어먼이는 서울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길 원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남녀공학에 지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양가댁 규수에게 의학은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적합하지도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 외할아버지는 약학을 권유했고, 어먼이는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고작 몇 년 후 외할아버지는 딸의 남녀공학 진학을 금하던 방침을 접었는데, 수혜자는 자녀들 중 가장 똑똑하다는 막내 이모였따. 단, 가정학을 전공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다.
둘째 딸인 작은 이모는 무용과 교수로, 빼어난 미모와 날카로운 유머감각의 소유자다. 작은이모는 이모라기보다는 언니 같은 재미있는 이모로, 내가 언제나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는 분이다. 춤에 미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던 이모 때문에 외할어비작 얼만아 골치를 썩였을까는 쉽게 짐작이 간다. 곶너발레는 1960년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따.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민망하게 딱 달라붙은 타이츠를 입은 남자가 반나체의 여자애를 무대 위에서 훌쩍 들어 올리고 공중에서 휙휙돌려대기까지 하니, 외할아버지에게 있어 발레는 스트립 댄스나 피장파장이었다. 양갓집 여식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발레를 향한 이모의 정열을 막기 위해 온갖 시돌르 다 해 보았다고 하는데, 이 문제를 종결시킨 것은 어머니였다. 이모가 최고 명문여대인 이화여대에 들어갈 수 있다면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해도 된다는 타협을 이끌어 낸 것이었다.
이모는 이화여대에 합격했고, 전문 무용수로 활약하다 대학교수갇 ㅚ었따.
우리 부모님은 국민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입시를 위한 과외모임에서 첨으 만났다고 한다. 두 남녀는 6년 후 대학생이 되어 서울의 대생과 이대약대생을 위한 '미팅'에서 다시 만났다. 학생회장이었던 아버지는 미팅을 주도하느라 이양기할 기회는 없었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자주 마주쳤다.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한 부모님은 서로 당신이 자기를 먼저 쫓아다녔다며 농담을 하곤 했다.
1973년, 아버지가 내과 수석 레지던트로 일하던 병원에서 나는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국 베링거 인겔하임 제약회사의 독일인 사장의 특별비서관이었다.
부모님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전래동화를 외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가며 몇 시간이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조숙한 이야기꾼이었다. 영특한 두 살배기 꼬마 여자애를 보려고 사방에서 이웃들이 몰려왔다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다.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은 몇 배는 부풀려진 곽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장남과 장녀 사이에 태어난 맏이로서, 나는 온 집안의 귀염둥이였다.
친할아버지는 인생의 막밪디에 다다라 살아가는 상태였는데 몸이 편찮았다. 할아버지는 사지를 늘어뜨리고 누운 채 때때로 격하게 흐느끼며 작은 집을 말 못할 슬픔으로 채웠따. 그러다가 혼수상태로 빠져들어 이내 조용햊디시곤 했따. 내게 할아버지는 향수의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해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는 친할머니와 고모 둘, 그리고 청소년이던 삼촌과 함께 잠실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로 건너편 공터에는 훗날 88올림픽 선수촌이 들어섰다고 한다.
부모님이 출근하면 할머니가 나를 돌봐주셨다. 할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주셨다. 격한 포옹에 숨이 멎을 것 같은 적도 이따금 있었다. 할머니의 양손은 부엌일로 축축했고 앞치마에는 절임국물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마치 짠내 나는 향수처럼, 할머니의 온 몸에서는 눈물과 뒤섞인 김치 냄새가 풍겼다.
어머니와 시어머니 사이의 기싸움은 예견된 바였다. 친할머니는 며느리가 아들 없이 딸만 둘 낳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괴로워했다. 훗날 어머니는 우리 집 막내인 셋째 딸을 낳게 되는데, 이로서 '딸만 셋을 두다니 운도 참 없구나'라는 한국식 한탄을 평생 주위에서 듣게 되이ㅣㅓ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양의학을 굳게 신봉했다. 믹국산 분유가 모윱돠 뛰어난 영양분을 갖추었을 것이라 믿은 어머니는 모유수유를 하지 않아따. 할머니가 종종 이런저런 병증을 고치기 위해 한방 약재를 쓰려고 하면 어머니는 질겁했고, 독한 냄새를 풍기는 약초가 밀매품이나 악마숭배에 사용되는 사악한 도구인 양 백안시했다. 나는 지금도 약초 냄새를 맡으면 긴장한다.
어머니의 시각에서 보면, 당신은 가족 내에서 현대적인 모습과 실용적 규율, 자제력을 대표하는 성원인 반면, 친할머니는 아픈 과거와 치유할 수 없는 슬픔, 미신숭배 등 이전 시대를 답습하는 상징이었다.
나는 창틀에 걸터앉아 빨래 비죽배죽 널린 빨랫줄과 베란다에 놓인 갈색 장독들을 내다보는 보릇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오후, 무료했던 나는 축축한 무릎 뒤로 창틀에 걸치고 몸을 뒤로 젖혀 대롱대롱 매달렸고, 이윽고 다리에 힘이 빠졌을 때 아무런 저항 없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1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장미덤불 위로 떨어진 것이다. 숨으 ㄹ쉬며 하늘을 바라보는데 팔다리에 가시가 박히고 꽃잎이 달라붙었다.
누군가 알아차리고 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가시를 털어냈다.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신선했던 장미꽃잎은 짓이겨져 있었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다시 창틀에 걸터앉았다.
나는 당시 군사독재 하에 있던 한국의 일상과 민주화 투쟁을 여전히 기억한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춰진 그 못브의 참의미를 나느 한국을 떠난 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야간통행금지도 기억난다. 공습경보 사일네이 길고 날카롭게 울리면 도로 교통이 멈추고 사람들이 자하로 몸을 숨기던 광경도 기억나낟. 매일 일정한 시각에 애국가가 울리면 걸음을 멈춰야 했던 살마들도, 데모를 하다 최루탄을 맞은 삼촌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된 아버지으 친굳르도 기억난다. 어두운 시대의 기억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난 부모님과 나는 훗날 미국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한국이 민주화되는 과정과 우리가 떠난 후 급격히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냉혹한 한국의 현실을 살폅존 어머니는 가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미국으로 가야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인생의 굴곡을 여러 번 겪은 경험 때문인지, 어머니는 가진 것을 모두 남겨두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에 위축되지 않고 미국 이민을 떠나기로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남인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와 세명의 동생을 한국에 남겨두고 낯선 나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평양이 양국 사이에 놓여 있어도 여전히 모든 가족을 다 보살필 수 있다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미국에서 의료행위를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미국에 직장을 잡은 후 비자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아버진느 멋진 미남 대위로 양평에서 육군 군의관 병역을 마쳤다. 그 후 시골 병원에서 6개월을 근무해야 의사ㅈ다격 취득이 가능했떤 당시 규정에 따라 제주도 서귀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갔다. 나는 매일 병원 밖에서 서성이며 아버지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병원 밖으로 못브을 드러내면 나는 기쁨에 넘쳐 미친 듯이 뛰어가 아버지 품에 안겼다.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손에 꼽을 만큼 너무나 행복했던 추억이다.
아버지는 내게 여러 가지 엉뚱한 이야기를 믿게 하려고 했다. 공공주택의 옥외 공동화장실 밑에 커다란 돼지가 살고 있다는 둥, 근처 섬에는 미역국을 먹지 않아서 턱이 갈라진 사람들이 산다는 둥, 여동생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는 내 이름'지영'이 당시에 대학시절에 쓴(그러나 출간하지 않은)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라고 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나는 내가 아버지의 이상적 여성상에 부합하기를 너무나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에 굳이 진실을 알아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립유치원에 나를 입학3시키는 데 성공했다. 웬만한 대학교보다 더 근사한 교정과 커다란 수영장을 갖춘 천주교재단 유치원으로, 대부분의ㅏ 부모들이 선망하는 곳이었다. 그 유치원 아이들은 짧은 빨간 망토와 모자를 쓰고서 모두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통원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하루 여덟 시간 정규 근무를 하는 어머니는 둔 원생도 나뿐이었다.
유치원 특별행사단체 생일축하파티에 어머니가 오지 않는 아이도 나뿐이었다. 어머니가 가끔이지만 점심시간을 틈타 늦게라도 유치원행사에 오면 참 좋았다. 재키케네디 스타일의 분홍색 모직 정장을 입고 필박스 햇(머리 위에 얹듯이 쓰는 둥근 모자로, 둥근 약상자[필박스] 모양과 닮았다.)에 선글라스를 쓴 어머니는 화려하고 멋졌다.
어머니는 우리 자매에게도 항상 아주 예쁜 옷을 입혔다. 우리 어머니는 남들과 달랐다. 그래서 나도 남들과 달랐다. 어머니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아들고 입을 맞추면, 마치 내 어머니가 아니라 나를 딸 역할의 아역배우로 선택하는 여배우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름다운 어머니가 너무 좋았고 어머니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어머니가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수녀들은 체벌을 선호하여 매일같이 학생들에게체벌을 가했다. 나도 두꺼운 나무 자로 거의 매일 매를 맞았다. 내가 나쁜 짓을 해씨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더 좋은 아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체벌의 이유엿따. 그러한 체벌이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다섯 살배기 아이들은 유치원 공연에서 뮤지컬이나 무용을 프로처럼 완벽하게 해내기는 했다. 화음과 박자, 음정을 완벽하게 연습한 결과였따. 반면, 지금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케임브리지의 사립학교에서 열리는 공연은 즐겁지만 제멋대로의 불협화음이 판친다. 그래도 나는 선생님이 내 아이들을 자로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밋ㄹ의 한 초등학교에서 60명의 조용한 학생들과 함께 몇 달간 1학년 생활을 했다. 집단예방접종을 받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고, 학교의 널따란 운동장에 모두 모여 군대식 아침체조를 하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이 칠판을 향해 나란히 앉은 교실의 벽 위에는 준엄한 풍경의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팔이 떨어질 듯 아플 때까지 양손을 높이 들고 서 있는 벌을 받기도 했는데, 왜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100점을 바딪 못한 아이들이 전보다 깎인 점수 만큼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르 매섭게 맞던 기억도 있다.
방과후에는 어머니가 일을 마칠 동안 학원에 가서 산수를 공부해야 했다. 나는 어머니가 무척 그리웠다. 때때로 나는 학원까지 혼자 걸어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하 교실로 난 창문을 통해 학생들이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연필을 움직이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내가 농땡이를 부린 걸 어머니가 알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나랑 있어 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먼이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우리가 미국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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