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잊을 수 없는 슈타이너 선생님 (3)

나는 학교에서 매우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이제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필요하면 소통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는 아직도 두려움과 고립의 장소였다. 나와 학교 사이에 놓인틈은 더 이상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넘어서기 힘든 것이었다.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렵고 꺼려졌다.


밤마다 겁에 질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수면부족으로 헛것을 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 아버지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아마 무엇이 두려운지조차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정체를 알 수없는 초조함 속에서 나는 머리카락을 뽑는 버릇이 생겼다. 한 번에 한 올씩, 굵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교실 책상 밑과 침대 옆에 수북이 쌓여갔다.


어린 시절 자주 꾸었던 꿈이 있다. 언제부터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엄밀히 따지면 꿈이 아니라 악몽이라고나 할까, 귀를 멍하게 할 정도로 크게 매미 떼가 운다. 나는 길을 잃었고, 집에 가는 길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나는 들판, 아니 미로를 헤매고 있다. 나를 둘러싸고 빽빽이 들어찬 풀이 나보다 키가 커서 그 너머를 볼 수 없다. 배가 고프고 목도 마르다. 게다가 나는 여동생을 등에 업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모르겠다.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는 건지, 멀어지는 건지,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도와줄 사람도, 물어볼 사람도 없다. 동생을 집에 무사히 데리고 가는게 내가 맡은 일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악몽에서 깨어나면 마치 막힌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또 다시 이 꿈 속에 갇힐까 나는 두려웠다. 매미 소리만 들으면 지금도 긴장감에 이를 악물게 된다. 20대 시절, 프로방스의  긴긴 어느 여름밤에 깨달은 일이다.


뉴욕 시에서 가장 똑똑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정년까지 공립학교 교사로 지내는 것이 상례이던 시절이 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선생님 다수가 그러한 세대로, 20세기 초반 동유럽을 탈출하여 미국 시민이 된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유대인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처음으로 자극한 안내자들로,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다. 클라인 선생님, 뉴먼 선생님, 로젠탈 선생님, 슈타이너 선생님, 그리고 코언 선생님, 엄격했지만 학생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던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너는 더 잘할 수 있다고, 네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따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들은 나의 수호천사였고, 내가 무너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따.


그렇지만 나는 엉망진차잉엇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하릴없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화를 낸 4학년 담임 슈타이너선생님, 나느 그날의 선생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교실에서 조용히 자습을 하라고 지시한 선생님은 냉게 교실 밖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나를 불러냈따. 나는 복도로 나와 벽에 기대섰다. 선생님은 화가 난 표정으로 잡아먹을 듯 가까이 다가와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니? 너는 미셸이나 사이먼에게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똑똑해. 그 애들만큼 잘하고 있어야 한다고."


 미셸과 사이먼은 수업 때마다 항상 손을 들고 정답을 말하는 학생이었다.(우연이지만 사이먼은 한인 소년이었다. 이사를 가 연락이 끊긴 후 거의 30년 만에 그는 내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는데, 하버드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두 아이는 항상 당연히 칭찬을 받았다.


"지니는 항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 하지만 너는 제일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소리 없이 흐느꼈다. 진실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슈타이너 선생님은 그날 집으로 갔고, 다시 돌아오지 안항ㅆ다. 편찮으시다고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폐암이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을 애도하기 위해 학교에서 추도식을 열 것이며, 전교생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할 학생을 한 명 뽑겠다고 교장선생님이 발표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각종 대회가 유행이었다. 없는 대회가 없었다. 철자법 마주칙 대회, 과학품평회, 재능발표회 등등, 슈타이너 선생님의 추도식에서 추도시를 읽고 싶은 학생은 자신이 쓴 추도사를 가지고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지원한 학생들의 추도사를 교장이 들은 후 최종 선발을 할 예저잉었다.


  선생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이들을 이용하여 추도사 낭독자를 뽑는 대회란, 연극 주인공을 뽑는 오디션도 아니고 기묘하지 않으나가?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슈타이너 선생님이라면 "내가 할수 있어요. 나도 다른 학생들하고 경쟁할 수 있어요. '전교생'앞에서 이렇게 어려운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하고 나서는 아이를 존경해 줄 거라는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었따. 생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를 실헝한 선생님이 사후라고 해서 마음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선생님은 이제는 앞으로 나서라는 의미로 나를 다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맞기 위해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이 아닌 나를 위해서

 나는 추도사를 썼고, 읽기 연습을 한 후 교장 선생님에게 갔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읽었으며, 죽음에 대해 현명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승자는 내가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유일한 참가자, 로즈메리가 승자였다. 그 아이의 추도사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추도사가 우울하고 어른인 척 허세를 부리는 글인데 반해, 그 아이의 추도사는 구구절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었다. 비록 추도사 헌정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슈타이너 선생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따. 전교생 앞에서 단상에 선다는 생각만으로도 겁에 질렸지만 그 마음을 최대한 누르고 노력한 나를 말이다.


 이 일 이후 나는 여러가지 대회에 계속 도전했다. 교내 철자법 맞추기 대회, 수학경시대회, 재능 발표회, 과학품평회, 학교 주제가 선정 대회 등등, 어느 대회에서도 나는 이기지 못햇따.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승부를 거는 것을 좋앟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따.

경쟁을 위핸 ㅗ력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느 ㄴ겨로가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도 즐거웠다.


 매일의 학교생활에서는 내성적 성향 때문에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남들 앞에 나서도 된다는 명확한 허락과 뚜렷한 길이 제시된 경우마다, 나는 나서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매번 도전할 때마다 전보다는 조금 더 용기가 났고 예의 끔찍한 수줍음이 잠시나마 사라지는, 참으로 신비로운 발전 과정을 겪었다. 미국독립전쟁을 다룬 4학년 연극에서 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패트릭 헨리의 역할을 맡아 열정적으로 외쳤다. "내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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