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피아노와 바이올린, 춤을 배우다. (5)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실제로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낭송할 수 있게 됐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부모님이 집으로 초대한 손님들을 대접할 수도 있었고, 아이들을 모아 연극을 꾸며 여흥거리를 제공할 수도 잇었다. 동생은 파스텔화와 유화를 여러 점 선 보였는데, 어린아이의 작품치고는 정말 대단한 수준의그림이었다. 내 어린 마음 속에 존재하는 퀸즈의 응접실에서, 나와 동생은 제인 오스틴의 세계에 나오는 교양있고 우아한 숙녀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상류층 여주인공인 양 공상하는 것보다 더 희한한 일이 퀸즈의 아파트에서 벌어졌다. 내가 공연이라는 것에 흠뻑 빠져버린 것이다. 그 순간을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부모님이 초대한 손님 앞에서 C.P.E 바흐(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아들)의 <솔페지에토 C단조>를 연주하던 나는 갑자기 기묘하고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재능 있느 ㄴ소녀로서 저녁식사 후 여흥거리로 부모님의 친구들을 대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단한 연주 기술로 좌중을 완전히 압도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따. 그렇다. 나느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경이로운ㅇ 존재가 되고 싶었따. 깊은 감동으로 그들의 세계를 뒤흔들고 싶었따. 하지만 훌륭한 공연을 선사하기 위해 필요한 연주 속도나 힘, 조절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쿵, 하고 내리쳤다. 그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실제로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나를 두렵게까지 한 야망의 근저에는 이러한 어린 시절의 깨달음이 있었다.
어머니는 얌전하고 그리 엄하지 않은 동네 선생을 대체할 적절한 피아노 선생님을 찾아냈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고 있는 랭 선생님이었다. 자리가 나지 않는다며 세 번이나 레슨 요청을 거절한 선생님은 어머니의 애걸과설득에 못 이겨 나를 만나보기만 하겠다고 동의했다. 랭 선생님 앞에서 나느 ㄴ쇼팽의<마주르카>를 쳤다. 내 실력은 별로였지만, 순전히 어머님의 집요함이 귀찮아서 랭 선생님은 나를 키워보겠다고 했다. 포기를 모르는 끈덕진 사람들이 짓는 고집스런 표정을 어머니가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십대 여성인 랭 선생님은 동유럽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유대인 이민2세였다. 하루에 몇 시간씩 꼭 연습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에야 나는 제자로 받아들여졌다. 랭 선생님은 엄격해서 내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가면 실망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껌을 씹으며 나타나든가, 질문에 대답은 않고 어깨만 으쓱하든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확실한 대답 대신 "그러죠 뭐"라고 답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났다. 선생님이 말을 할 때는 시선으 ㄹ똑바로 맞춰야 했고 작별인사의 악수는 힘차게 해야 했다.
선생님이 기본의 기본으로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한 곡을 여러 마디로 이루어진 악절로 나눠 메트로놈의 가장 느린속도 똑, 딱똑,딱에 맞춰 익힐 것 반복 연습을 아주 많이 한 후, 아무 문제없이 그 속도로 악절을 연주할 수 있게 된 후에야 메트로놈 속도를 한 단위 높일 것, 새 속도에서 동일한 과정을 되풀이한 후 속도를 한 단위 더 높이고 또 반복할 것, 이런 식으로 반복 연습을 수없이 하며 속도를 계속 올린 후 곡의 당므 악절로 넘어가게 되면 다시 가장 느린 속도에서 시작해야 했다. 마디 별로, 악절 별로 속도를 한 단위씩 높여가며 한 곡 전체를 소화한 후에야 비로소 그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 시점에 이르면 내 손가락과 손은 해야할 일을 햇다. 필요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유롭게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마침내 내 양손이 생명을 얻어 스스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손의 움직임과 선율의 얽매임에서 자유로워졌다. 새를 날리기 위해 천공을 여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을 통해 음악이 울려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하도 기묘해 무언가에 홀린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것이 내가 신성이란 것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생각해본다.
랭 선생님은 내게 청중 앞에서의 정기적인 연주와 경연 참여를 요구했다. 나란 아이는 일정의 목표가 눈앞에서 대롱거리며 나를 놀리고 유혹하며 겁을 주기 전에는 연습을 할 유형이 아니라고 믿은 것이다. 나는 바흐의 <인벤션>과 모차르트의 <소나타>, 쇼팽의<야상곡>과 <왈츠곡>들, 슈베르트의 <즉흥곡>들을 익혔고 마침내는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소나타>, 쇼팽의 <연습곡>, 드뷔시의 <전주곡>들까지 익혔다. 이 곡들을 가지고 나는 몇 년동안ㅇ 랭 선생님이 골라준 다양한 어린이 피아노 경연에 참여 했다.
하지만 나는 연주를 해야할 때마다 지독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배다 딱딱해지며 아팠고 식은땀이 났다. 손가락이 차갑게 굳었다. 연주 몇 시간 전부터 장갑을 끼어도 소용 없었다. 무대에 올라 자리를 잡은 후에도 연주할 곡이 기억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까 초조한 나머지 온몸이 굳었다. 좋지 않은 상상에도 시달렸다. 연주를 미루고 시간을 벌기 위해 피아노 의자의 높낮이를 자꾸 손보며 그 동안 곡을 기억해보려 하지만, 결국은 멍해지고 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겪는다는 전형적인 '꿈 불안장애'의 증상이었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 꿈 불안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은 어느 순간 땀에 흠뻑젖어 깨어나 꿈을 꾼것을 깨닫고 안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이러한 머릿속 상상은 꿈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일어났따. 무대에 오르자 머리도 손도 꽁꽁 얼어붙어싿. 평소 마주칠까 두려워 했떤 끔찍한 정신적, 신체적 장애물이 실제로 나타나자 극복할 수 없었다. 콘서트 도중 여러 악절을 통째로 잊어버린 나는 경악하여 침묵한 청중앞에서 나의 명백한 무능함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약간이라도 연습이 부족하다고 느낀 날은 공연중 당황하여 실수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런 경우 그 두려움은 현실화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치명적인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다소 불완전한 전략을 두 가지 세워싿. 첫째는 과도한 연습, 누가 새벽 세 시에나를 깨워 연주를 시키더라도 반쯤 깬 상태에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을 하는 전략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내가 무대에 오르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을 무렵엔 조바심 따위는 버리고 상황을 장악한, 자신감 있고 준비된 연주자가 되어 있도록 상상을 거듭하는 것이다.
나는 음악 무대 공포증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년에 걸쳐 노력한 결과, 공포증에 완전히 굴복하기보다는 힘껏 싸워 잠깐씩이나마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 음악 그리고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삶에 선사한 끝없는 기쁨의 샘 외에도 내가 어린 시절 음악의 경험에서 얻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확신이다. 어느 장소나 어떤 경우에도 무대 공포증이라는 유령에 거의 확실하게 맞설 수 있다는 그러한 확신
나는 피아노에 그치지 않고 두 번째 악기로 바이올린도 배웠다. 딸이 현악기에도 능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한국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인 한 선생님에게 나를 데려갔다. 명랑하고 활달한 한 선생님은 퀸즈 커뮤니티 칼리지의 지하 교실에서 나를 가르쳤따. 2년여의 레슨 끝에 나는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1악장의 제1바이올린 부분을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바이올린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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