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1979년 여름, 뉴욕 그리고 영스타운
1979년 여름, 내가 만 여섯살, 내 동생이 만 네 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뉴욕으로 떠났다. 증가하는 인구 탓에 수십 년 동안 의료난을 겪던 미의회는 고숙련 전문직을 우대하는 이민법을 통과시켰고, 그 이민ㅇ법의 혜택으로 1970년대 초반 미국에 건너온 한국 이민ㅇ자들의 약 3분의 1이 의사였다. 아버지의 의대 동안 약 절반이 이민의물결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덕분에 아버지 동창회는 가끔 서울이 아닌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에서 열리곤 한다.
고향을 떠나기로 한 부모님의 대담함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한국에서 쌓은 지위도 버리고 뉴욕의 브루클린 쥬이시 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는 영어도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당시의 한국인 이민현상을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이주의 연장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가진 것을 남겨두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경험을 한국전쟁에서 겪은 경험의 반복이었다. 이민은 새로운 미래를 뜻하는 동시에 고향으로붙어의 유랑이라는, 그리 오래전이 아닌 과거와 맥락을 같이하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훗날 고모들이 전하기를, 내가 미국으로 떠난 ㅁ후 친할머니는 나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거의 실성할 만큼 절망에 빠졌다고 했다. 흐느끼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잠실 일대를 해매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길가에서 뛰어노는 옂다아이들이 모두 나로 보였으리라.
영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퀸즈 자메이카(뉴욕 시의 행정규역)에 위치한 천주교재단의 홀리 패밀리 초등학교에 1학년으로 들어갔다. 친할머니가 천주교 신자이기는 했지만, 부모님이 종교적인 이유로 학교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근처 공립학교는 적절한 학습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판단 끝에 가계 재정상 꽤 부담이 되는 학비를 감수하고 사립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내 학비 때문에 동생은 일주일에 이틀만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고, 동생은 그 소중한 이틀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머지 나날을 보냈다.
단 한 마디의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환경에 갑자기 떠밀려 들어갔을 때 느낀 극한의 공포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언어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이제 그 끈이 끊어지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공통의 언어라는 울타리에서 떨려났다는 외로움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화장실에 가도 되나요'하고 묻는 것조차, 마실 물을 얻는 것 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점점 깊어지는 고립 속에서 나의 존재는 점점 작아져 갔고, 내 자리를 취하지 못한 채 말 못하는 관찰자로 1학년을 보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웃음소리를 들어도 같이 웃을 수 없었으며, 학급활동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나의 거리감을 더 깊게 만들었다.
여섯 살 어린이의 경우, 언어를 관장하는 뇌는 유연ㅇ하다. 몇달의 시간이 흐르자 영원히 머무를 것 같던, 지독하게 수동적인 침묵의 구름이 서서히 걷혀 갔다. 이해할 수 없던 소리가 일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단어들이 모여 이해의 틀을 이루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의 모양새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엇따. 이렇듯 '0퍼센트의 이해도에서 시작하여 극도의 고생 끝에 상황을 장악하는' 지난하고 아픈 과정은 배움과 인생에 있어서 나의 고통스런 모델이 된 것 같다. 역량이 심하게 부쳐 길 잃은 감정을 맛본 경험은 내 성격 형성(아니, 성격의 파괴라고 해야 할까)에 여러 모로 영향을 미쳤다. 매운 난폭한 방식을 통해 생존을 위한 본능을 일깨우고 관찰의 힘을 기르게 된 아이는, 한ㅇ국어 표현에 의하면 '눈치'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시절은 정말 힘들었다. 꿋꿋하게 시련을 이겨내려는 나의 능력과 의지가 지금껏 살면서 그 당시보다 더 혹독하게 시험에 든 적이 없다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어 이해에 문제가 전혀 없느 ㄴ지금도 그 시절 느낀 고독의 물결이 때때로 밀려올 때가 있는데, 당시 맛보았던 정체를 알 수없던 단절의 기묘한 감각을 순간적으로 또 다시 느끼곤 한다.
외할머니는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지혜와 나에게 조각보 이불을 한 채씩 꾸려주었다. 무늬가 맞는 한 쌍의 이불로, 동생 것은 초록색, 내 것은 주황색이엇다. 우리와 함께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그 이불은 어린 시절 내내 우리 침대를 덮고 있었다. 우린 아직도 그 이불을 가지고 있다. 동생 것은 흠집 없이 여전히 새 것 같지만 내 것은 너덜너덜하고 여기저기 기워서 거의 폐기 직전이다.
불안에 떨던 내가 안온한 느낌을 가루갛면서 하도 자주 껴안아서 해진 것이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항상 함께햇던 이 이불은 이제는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워지고 투명할 정도로 닳아서 면이 아니라 하늘거리는 시폰 천처럼 느껴질 정도다. 지금도, 낯익은 포근함에 감싸여 안전하믈 느끼고 싶은 밤에는 이불ㅇ장에서 그 이불(이불의 잔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을 꺼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너덜너덜한 이불이 꺼내질 때마다 조금씩 더 상하기 때문에 되도록 꺼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이불이 아니다.
나는 언제부터 김치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소아기적 혐오를 느끼더라도 어느 순간엔 김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한국아이들이다. 한국인이 김치를 원하는 것은 피할 수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외였다. 코를 날카롭게 찌르는 냄새에 계속 적응하지 못했다. 발효된 짙은 냄새에 숨이 막혀 고개를 돌려야 했다. 나는 김치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피했다. 냉장고 안 유리병 속에 꾹꾹 눌러 담긴 김치, 핏빛 국물 위로 솟은 밝은 주황색의 김치에서 풍기는 냄새는 지울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한민족의 본능이 곧 모습을 드러내겠지, 낙관하던 어먼이는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내게 김치를 먹이려는 노력을 멈췄다. 절인 배추에서 풍기는, 코를 찌르는 냄새는 나의 비틀린 일면을 남에게 들켯을 때와 같은 부끄러움과 연관이 되었따. 나는 김치를 먹지 못하는 한국 아이엿고, 이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미국행 노스웨스트항공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는 미국의 풍요로움에 대해 이야기햇따. 우리가 가는 곳은 번영의 땅으로 물자가 매우 풍족하여 사람드링 도둑 때문이 문을 잠그는 일도 없다고 했다. 당시 뉴욕은 불안한 치안으로 악명 높았다. 우리가 자리 잡은 퀸즈는 엄마가 약속했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따. 일주일이 멀다하고 불쾌한 범죄형 사건이 꼬박꼬박 발생하는 것 같았고, 거리가 주차 해놓은 우리 차도 피해를 입었다. 우리 차는 갈색 스테이션 왜건이었는데, 누군가가 야구 방망이로 차장을 부수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뜯어간 것이다. 아파트에 도둑이 든 적도 있었다. 훔쳐갈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전업주부가 된 엄마는 예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자유시간과 에너지를 철저히 즐겼다. 우리 옷을 짓고,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 동안 재즈 즉흥연주 수업까지 들었다. 우리는 엄마가 손수 지어준 예쁜 물방울무늬 광대 의상을 입고 할로윈의 밤거리에 나서기도 했다. 집에 장난감은 거의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하나씩 받았던 게 기억난다.
미국에서 몇달을 보낸 후 아버지는 뉴욕이 평소에 꿈꾸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곳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렷다. 오하이오 주에서 진료를 하는 의대 동창생들과 상담을 한 아버지는 오하이오 주 영스타운에 위치한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영스타운으로 이주했고 나는 새 학교에 2학년으로 들어갔다. 미국 중서부 도시 영스타운은 다양한 인종이 사는 지역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내 동생 또한 마찬가지엿다. 우리 자매의 영어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동생의 유치원(미국 유치원은 의무교육으로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선생님은 동생이 청각장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질문을 하면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오해가 너무답답했던 어머니는 영어를 잘 모르는 아이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겪고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선생님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하고 결국 청각전문의에게 동생을 보내게 되었다. 전문의가 행한 광범위한 청각 테스트는 놀라울 것도 없이 동생의 청각이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우리를 천주교재단 학교에 넣었다. 근처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종교교육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학교 성격상 딸려 오는 종교교육을 굳이 거부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곧 달라졌다. 학생들은 2학년부터 첫 영성제 예식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학교는 매일 일정 시간 종교수업에 할애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그 수업에는 참여시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언어장벽으로 이미 고립된 상태에서 나는 다른 아이들이 성장의 예식을 함께 준비하며 더 친해지는 동안 혼자 앉아 있어야 했다. 괴로웠다.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세상에 더 뚜렷하게 알리고자 하는 음묘에 말려들었나, 의아햇다. 마치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철강도시로 유명한 영스타운은 주민들 다수가 제철노동자였는데, 우리가 도착한 1980년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철강산업이 10여년간 하락세를 겪는 바람에 제철소들이 문을 닫았고 실업자들이 양산된 것이다. 영스타운은 예전의 영화를 결코 다시 누릴 수 없을 터였다. 나와 친했던 제니퍼의 아빠도 그 해 공장에서 해고된 철강노동자였다. 암울한 분위기였다.
훗날, 법대에서 나는 제철산업과 관련된 한국전쟁 당시의 유명한 판례를 배우게 된다. 철강노조의 파업이 한국전쟁에 악영향을 미치고 소련의도발을 조장할 것이라 믿은 트루먼 대통령이 1952년 제철소들을 압류한 사건을 다룬 '영스타운 쉬트앤튜브 컴퍼니 대 소이어', 일명 '철강 압류 사건'이라 불리는 판례인데, 미 대법원은 대통령에게 제철소를 압류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행정권 제한에 대한 이 획기적 판례를 하버드법대 헌법 수업에서 공부하며 나는 처음으로 영스타운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기억과 미군의 한국전쟁 개입, 한국에서의 우리 가족사를 처음으로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스타운의 한인사회는 작지만 활발했다. 한인들은 일요일마다 한 감리교회에 모여 주일 아침예배를 드린 후 하루 종일 먹고 놀았따. 그러던 어느 날, 한인사회에 대해 알게 된 한 지역 방송국이 영스타운의 한인과 한인문화를 다룬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며 연락해 왔다. 어머니는 Tv 방송을 위해 당신의 맏딸이 한국 고전 무용을 출 것이라고 자원했다.
"엄마 난 춤출 줄 몰라."
"괜찮아, 내가 가르쳐 줄게."
고전무용이라곤 전혀 몰랐던 어머니는 내게 한복을 입히고<도라지타령>노래 테이프에 맞춰 당신 눈에는 그럴 듯하게 보일 정도의 발짓을 지어냈다. 뉴스 편집자는 전통의상을 입고 모국의 '정통'무용을 추는 한인 꼬마소녀에게 홀딱 빠졌다. 춤을 추는 내 모습은 한인들을 다룬 지역뉴스 방송에 나왔을 뿐 아니라, 이후 수년동안 저녁뉴스 오프닝 영상에 포함되며 불멸의 생명을 얻었따.
무용수 이모가 동료 무용수들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텔레비전에 나온 내 영상을 자랑햇따. 무용수들은 어머니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만든 내 발짓을 보며 심장마비가 올 정도로 웃어댔고,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어딘가로 도망쳐 죽고 시펑ㅆ다. 다시는 엄마에게 떠밀려 세간의 관심을 받지는 않겠다고 맹세했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창피하게 만든다면, 그건 바로 내 의지에 따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레지던ㅌ츠 주거용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와 병원은 밋밋하고 차가운, 비밀 공습대피소처럼 생긴 기다란 지하터널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병원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할 수 이썽ㅆ다. 레지던트들이 누리는 ㅎ몌택의 하나였다.
부모님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멕시코인 가족 둘과 친해졌다. 남편들은 우리 아빠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영스타운에 레지던트로 온 사람들로, 아빠와 함께 근무햇따. 아내 셋은 함께 모여 바느질과 직조를 하고 베갯잇과 냄비 받침 등을 만들면서 낮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멕시코인 과 한인은 우호적인 결투를 벌이게 되었따. 모국 음식이 얼마나 매운지에 대해 서로 뻐기던 남편들이 마침내 결전의 날을 가지기로 한것이다.
김치 대 멕시코 요리, 매운 향료의 대전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맵게 만든 김치를 멕시코 친구들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즐겁게 해치우는 동안, 우리 부모님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혓따.
교회에 가지 않는 주말의 영스타운은 별로 할 것이 없었다. 우리는 대형 쇼핑센터인 K마트 안을 누비든가, 동네 맥도날드에 설치된 어린ㅇ이 놀이터에서 장난치며 시간을 보냈다. 맥도날드에서 청므으로 빅맥을 맛보던 날을 기억한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나는 구역질이 났다. 미국식 피클, 양겨자, 마요네즈를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던 내 입에 그 세 가지가 한꺼번에 다 들어온 것이다. 내가 아느 ㄴ햄버거는 이런 맛이 아닌데? 토할 것 같았다. 그 세가지 음식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금지품목이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질 지경이다. 그런데 실수라도 해서 먹게 된다면....., 아 ,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영스타운에서 레지던트로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채 되지 않아 아빠는 여기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아버지는 브루클린 쥬이시 병원에서 아빠의 조언자 역할을 했던 친절한 분에게 다시 받아달라고 요청했따. 이리하여 오하이오주로 이사 온 지 일년 만에 우리는 스테이션 왜건 뒤에 연결한 이삿짐 트럭에 다시 짐을 싣게 되엇따. 창고 세일에서 중고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가져다 준 새 볼드윈 업라이트 피아노까지 모두 밀어 넣은 후 우리는 오하이오 주를 떴다. 밤에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트럭운전사들과 함께 잠을 자고 낮엔은 부지런히 뉴욕으로 차를 몰았다. 퀸즈에 도착햇을 때 우리느 ㄴ전 재산을 차 뒤에 질질 끌고 다니며 셋집을 찾아 유목민처럼 동네를 헤맸다. '세 줍니다'라는 푯말을 볼 때마다 차를 멈추고 문의를 했따.
내가 자란 퀸즈 아파트 건물엔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구성이었다. 요르단과 멕시코, 아르메니아, 일본,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중국, 쿠바,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온 아이들이 나랑 놀았따. 여러 곳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사정은 너무나 똑같았다. 전쟁과 피난, 원치 않은 이주, 생존탈출, 그리고 재건, 모두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당시는 어른 없이아이들끼리만 돌아다니며 놀아도 괜찮은 시대였다. 부모가 성인의 관리 없이 아이들끼리만 있게놓아두어서는 안된다는 철칙이 있기 전이었따.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사계절 내내 밖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침부터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학교수업도중만 아ㅣㄴ면 아무 거리낌 없이정ㅅ니이 나갈 정도로 신나게 놀았따. 롤로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고, 툭, 하고 치기놀이를 하고, 삽방치기놀이에 고무줄놀이를 하고 분수 사이로 뛰어다녔다. 겨울엔 플라스틱판을 타고 썰매놀이도 했다.
우리는 친구네 집에 몰려가 전날 먹다 남은 만두와 카레, 굴라시수프를 얻어먹엇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독재자, 제노사이드,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친구들 나라의 전통복장을 입고 놀기도 했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긁히고 멍이 들기도 했고, 부모님들 모르게 싸우고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자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보육하는 오늘날의 자녀교육법 관점에서는 끔찍한 일이겠다. 내가 소녀 시절 퀸즈에서 맘껏 누렸떤 자유와 스릴 넘치는 위험이 얼마나 아찔하고 흥분되는 것이었는지 내 아들딸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미국에 온 지 2년이 채 안 되어 나는 영어로 생각하고 꿈을 꾸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눈치 챈 부모님은 집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밀려들기 시작한 파도는 다스리기엔 너무 거셌다. 한국어 엄수라는 부모님의 단호한 결심은 흔들렸다. 새로운 삶을 헤쳐 나가는 이민자로서 어머니 아버지는 다른 긴박한 문제가 많았다. 생존의 급박한 필요성에 훈육의 시행은 뒷전으로 밀려낫따. 아이가 집에서 영어를 사용하면 쫓아내거나 벌을 심하게 주는 한인이민자 가족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두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딸들을 키우려는 의욕을 서서히 포기했고, 부모가 한국어로 말하면 자녀는 영어로 대꾸하는 등, 두 언어가 무리 없이 병용되는 정도에 만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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