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여러분에게 가자마 진을 선사하겠다.
말 그대로 그는 '기프트'이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시험받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자 여러분이다.
그를 '체험'하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달콤한 은총이 아니다.
그는 극악이다.
개중에는 그를 혐오하고, 증오하고, 거부하는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 도한 그의 진실이며, 그를 '체험'하는 이의 안에 있는 진실이다.
그를 진정한'기프트'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유지 폰 호프만 -
"세상에, 정말 놀랐어."
시몽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자꾸 같은 말만 반복햇다.
"호프만이 예상한 것과 똑같은 반응을 미에코가 보였으니까, 게다가 설마 미에코가 그럴 줄이야. 뜻밖이었어. 모스크바 쪽 잔소리꾼들이 반응했다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
옆에는 미에코가 와인 잔을 손에 들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스미노프 역시 묵묵히 잔을 비우고 있지만 곰곰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까부터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호프만의 추천서 사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밤은 아직 활기로 가득하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자동차가 붉은 유선형 꼬리를 끌며 흘러간다.
세 사람은 교외 비스트로의 조용한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들었다.
1년에 몇 번 찾아와서 오랜 시간 들입다 퍼부으며 토론을 벌이는 이 세 사람을 기억하고 있던 가게 주인이 그 자리로 안내 해주었다.
식사를 대충 끝내고 왔는지, 식욕이 별로 없는 건지, 테이블위에 놓인 접시는 얼마 없는데 와인은 이미 두 병이나 비어 있었다.
미엨노가 토라진 이유는 민망함을 감추려고 그런 것이기도 했다.
눈앞에 그 민망함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난처한 얼굴로 서로 마주보는 시몽과 스미노프를 보고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미에코는 "당장 보여줘!"하고 난폭하게 그 사본을 시몽의 손에서 낚아챘다.
거기 적힌 문장을 보고 미에코는 말 그대로 '찍소리도 못 하는'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윽고 그 문장을 되읽는 사이 서서히 수치심이 일고 식은땀이 맺히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충격, 혼란, 수치심, 굴욕감.
한 덩어리가 되어 몸속을 빙글빙글 도는 그 감정들을, 추천서 사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꾹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그런 미에코를 안쓰럽다는 듯이, 한편으로는 짓궃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싿.
어쨌거나 방금 전 오디션이 끝나고 그녀가 가자마 진에 대해 보인 반응을 이미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호프만이 편지 속에 그대로 예고해놓았기 때문이다.
예견한 호프만이 대단한 걸까, 예상과 똑같은 태도를 보인 미에코가 미숙한 걸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미에코는 호프만의 예고와 똑같은 태도를 취한 자신에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지금쯤 천국에서 "그것 보렴"하고 웃고 있을 호프만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다.
"정말, 사람이 짓궃다니까."
미에코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평소 같으면 해방감과 함께 맛보았을 와인이 오늘 밤은 유독 씁쓸했다.
솔직히, 추격이었다.
미에코는 어렸을 때부터 야성적이고 천진난만하다는 평가를 바다왔다. 굳이 말하자면 문제아 취급을 받아본 적은 있어도, 우등생이라는 평가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미에코가 틀에서 벗어났다느니, 천박하다느니, 지나치게 분방하다느니 하는 온갖 에두른 표현으로 과거에 자신을 헐뜯었던 일본이나 유럽의 교수들처럼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이의 음악성을 부정해버렸더니,
갑자기 오싹해졌다.
머리가 굳기 시작한 걸까? 혹시 나이가 들어 시시한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는데 미처 깨닫지 못한 걸까? 나만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노라 다짐햇는데, 어느새 무심코 '귄위'의 편에 서버렸다는 말인가?
저도 모르게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데 미에코, 왜 그렇게 화를 냈던 거야?"
그때까지는 재미있따는 듯 미에코를 실실 놀리던 시몽이(손주를 볼 때까지 이 일로 미에코를 놀릴 게 분명하다) 문득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
"그런 반응은 처음 봤어. 미에코가 평소 화낼 때와는 달랐어. 미에코는 화를 내면 오히려 굉장히 음험 ..... 그러니까 사늘해지잖아? 어째서 그렇게 거부했떤 거얌?"
미에코도 어라 싶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이상했다. 이미 그때 느꼈던 분노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연주가 어떤 것ㅇ니었는지 기억을 되짚기도 어려웠다.
이유가 뭘까? 무엇이 그토록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걸까?
"그보다 넌 아무것도 못 느꼈어? 그 오싹함, 불쾌감, 생리적인 거부감."
미에코는 알맞은 표현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말을 헛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오롯이 다망낼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시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짜릿하고 행복해서 이거 좀 위험하다 싶기는 했지만."
"그거야."
미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감정은 아마 혐오감과 종이 한 장 차이일거야. 똑같은 감정을 느껴도 그걸 쾌감으로 받아들이는가, 불쾌감으로 받아들이는가, 그 차이가 아닐까?"
"일리가 있네, 쾌락과 혐오는 표리일체니까."
오디션의 분위기는 특별하다. 설사 녹음을 한다 해도 그 자리에서 느낀 감정은 다시 재현할 수 없다.
넌 굳이 오디션을 볼 필요가 없잖니?
갑자기 어디선가 들었떤 목소리가 미에코의 머릿속에 훌쩍 되살아났다. 온화하면서도 어딘가 웃음을 머금은, 그러면서도 엄격한 신비한 목소리
호프만 선생니므이 목소리다.
가슴깊은 곳에 둔한 아픔이 찾아와, 잊고 있던 감각이 발밑에서 기어 올라와 온몸을 뒤흔들었다.
아아, 그런가.
미에코는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렷다.
나는 그 아이를 질투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력서에 적혀있던 그 한 줄을 본 순간부터, 남몰래 화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지 폰 호프만을 다섯 살 때부터 사사.'
겨우 그 한 줄에, 사실은 자신의 이력에 적어넣고 싶었던 그 짧은 한 줄에.
"글쎄, 그 소년은 정말 훌륭했던 걸까?"
시몽이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세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의견에는 미에코도 동감이었다.
"가끔 있지, 뭔가 이상하게 달아올랐지만 그때분인 경우."
"그야 우리도 사람이니까."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순서의 문제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컨디션 때문인지, 아니면 마가 낀 건지, 천사가 지나간 건지, 오디션 회장이나 1차 예선에서 듣고 이거 거물이구나 하고 흥분했다가도 그 후에 들어보면 실망한느 경우가 가끔 있다. 나중에 들어보면 오디션 때는 열에 들떠 본인도 어떤 연주를 했는지 기억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따로 있어."
스미노프가 심각한 투로 입을 열었다.
"문제?"
시몽과 미에코가 동시에 물었다.
"점점 알 것 같아. 호프만이 '극약'이라고 말한 의미를."
스미노프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불온할 정도였다. 그가 몸을 살짝 내밀자 비스트로의 의자가 끼익하고 위협적이 ㄴ소리를 냈다.
"무슨 뜻이야?"
시몽이 오른쪽 눈썹을 치켰다.
"우리가 커다란 딜레마를 떠안았다는 뜻이지."
스미노프는 물이라도 마시듯 태연히 잔으 비웠다. 실제로도 술에 엄청나게 강한 스미노프에게는 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물며 그가 무너가 생각에 잠겨 있으면 흡입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딜레마?"
그렇게 중얼거린 미에코는 거의 맨 정신으로 보이는 스미노프의 옆얼굴을 보며 불안을 느꼈다.
미에코는 혼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지만 가자마 진이 물러난 뒤에 스태프들이 보인 흥분은 굉장했다.
아직 콩쿠르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일찌감치 스타가 탄생했다는 듯이 모두가 기대를 이벵 담았다. 마지막에 등장헤 바람처럼 훌쩍 떠난 것도 한몫했으리라. 화제의 주인공인 이미 모습을 감추었는데도 회장에는 식을 줄 모르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유일하게 그를 상대했던 스태프가"가자마 진의 손은 흙투성이었고, 아버지 일손을 돕다가 늦었다고 했다. 대기실에도 들어가지 않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라고 설명하자 가자마자 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것이 이제 막 시작된 그의 '전설'에 바라 마지않는 에피소드가 될 것임은 분명했다.
"아버지가 뭘 하는데?"
스미노프가 짜증스럽게 물었지만 사무국에는 그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력서 이상의 정보는 거의 없어, 심사 위원과 사무국이 가진 정보가 엇비슷했다.
보통 합격자는 바로 결정해서 후보에게 결과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번에 자리를 옴겨 협의에 들어간 세 사람은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 격렬한 응수가 오가는 것을 스태프들이 복도에서 어리둥절하게 얼굴을 마주 보며 듣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미에코가 가자마 진을 합격시키는 데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심사는 점수제로 순수하게 점수를 많이 단 사람부터 차례대로 합격되는데, 오디션의 경우 하한선이 정해져 있어 그 점수를 넘지 못하면 합격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가자마 진 이외에 합격시켜도 되겠다고 생각한 후보는 두 명이었는데 세 사람의 의견이 거의 일치해 그쪽은 쉽게 정했다.
사실 거의 모든 시간이 가자마 진에게 소비되었다.
시몽과 스미노프가 최고점에 가까운 점수르 ㄹ주었기 때문에 미에코가 0점을 주어도 가마자 진은 간신히 합격선을 넘는다. 그대로 미에코를 무시해도 가자마 진을 합격시킬 수는 있지만, 시몽과 스미노프가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의가 한 없이 길어진 것이다.
미에코는 미에코대로 가자마 진의 합격이 이미 결정된 사실이란 걸 알면서도 그걸 철회시키기 위해 두 사람에게 계속 저항했다.
미에코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그가 호프만의 제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반대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가 호프만의 제자임을 밝히고 진짜 추천서까지 받았다면 호프만의 음악성을 정면으ㅗ 부정하는 그런 황당한 스타일의 연주는 용서할 수 없어. 마치 스승의 음악성을 모독하고 스승에게 싸움을 거는 격 아니야?
그걸 음악가의 태도라 할 수있을까? 그가 음악가로 독립해 이 기회에 스승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려 하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이 단계에서 스승의 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문제가 있어
.
시몽과 스미노프는 일단 미에코의 의견을 받아들인 다음, 번갈아가며 공격했다.
그에게 월등한 기술과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그렇다면 그의 음악을 용납하고 말고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일정 수준에 이르면 기회를 준다. 그것이 이 오디션의 목적이고, 후보자의 음악성에 대한 취향은 지금 시점에서는 고려할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이만큼 토론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아? 이렇게 정반대되는 지지와 거부를 서로 다른 관객에게서 이끌어낸다는 것 은 그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야. 항상 심사 위원이 만으면 하자가 적고 시시한 후보만 남아 재미가 없다고 했던 건 미에코였잖아? 어쩌면 오행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가 관객에게 인상적인 감정을 준 것은 사실이니, 그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물며 탁월한 기술가지 갖추고 있으니,
두 사람의 설득에는 허점이 없었다. 차츰 열세에 몰린 미에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에 이어진 두 사람의 말이 결정타였다.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지 않아? 그게 정말 요행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모스크바나 뉴욕 녀석들에게 저 아이의 연주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 그 녀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지 않아? 그 녀석들을 짜증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잖아?
두 사람은 미에코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오디션을 담당하고 있는 그룹들 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결코 반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모스크바와 뉴욕을 담당하는 그룹은 미에코 팀이 뒤에서 '귄위파'나 '양식파'라고 부르는(물론 비꼬는 표현이다) 멤버들이었다.
그리고는 미에코는 그만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그 훌륭한 분들게서 가자마 진의 연주를 듣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히스테릭하게 어째서 저런 천박한 연주를 합격시켰느냐고 외치는 모습을, 달려드는 그들을 태연히 바라보는 자신들의 모습을
솔직히 자기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떤 것을 잊을 정도로 그 장면은 몹시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그 유혹때문에 마지못해 가자마 진의 합격을 받아들이고 만 것 또한 사실이었다.
좋았어, 합격자들에게 연락하자.
미에코의고개가 끝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시몽과 스미노프가 동시에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스태프를 불렀따.
미에코는 아연실색햇다. 당했다. 두 사람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생각햇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어쩌면 한발 늦었다고 생각한 것은 스미노프엿는지도 모른다. 미에코는 그림자처럼 다가온 점원이 세 번째 병을 기울여 잔에 따라주는 와인을 받으며 스미노프의 옆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껏 정규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ㅁ놋했을 거야."
스미노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대에 나왔을 때의 태도, 곡을 연속으로 연주한 점, 어쩌면 남들 앞에서 연주한 것도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ㄹ라. 호프만은 그걸 알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추천서를 보내 자기가 가르쳤다고 이력서에 쓰도록 만든 거야."
"어째서?"
어렴푸싱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시몽과 미에코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스미노프도 두 사람이 눈치챘다는 걸 안다는 표정으로 똑같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오디션에 내보내 합격시키기 위해서지."
"그건 당연한 것 아냐?"
미에코가 어깨를으쓱했다.
그걸 본 스미노프는 한층 요란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이, 시치미는 그만 떼, 둘 다,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다 알면서."
스미노프는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낮에 미에코가 말한 대로야, 우리는 호프만의 음악성을 부정할 수 없어. 그를 너무나 존경하고, 그의 음악이 너무나 훌륭했으니,까, 그리고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그 표정은 단호했다.
"그리고 가자마 진은 합격했어. 호프만이 바란 대로 우리는 그를 합격시키고 말았어. 스태프들이 열광하는거 봤지?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거야. 물론 호프만의 추천서에 적힌 내용도."
미에코는 왠지 모르게 오싹해서 몸을 바르르 덜었다.
"애초에 어째서 추천서를 붙였을까? 그건 떨어뜨리지 못하게 하려는 장치야. 소중한 제자를, 소중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장치지."
스미노프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시몽이 뒷말을 받았다.
"추천서가 없는 녀석은 떨어뜨릴지도 모르니까."
스미노프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그야 우리는 실상 '정규 음악교육'으로 입에 풀칠하고 있는 셈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레슨비를 받고, 음대에 넣어 수업료를 받아내지. 그만큼 수고와 시간을 들인 소중한 제자를 어느 누가 돈 한 푼 낸 적 없는 정체 모를 인가노가 똑같이 취급하려 들겠어? 그럴걸 예상한 추천서야."
미에코는 문득 근래 어디선가 들은 소문을 떠올렸다.
일본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한 어느 피아노 콩쿠르에서 월등한 ㅈ천재 후보가 우승했지만 국내 음악계 연줄이 하나도 없었고, 심사 위원은 물론 그 관계자에게도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던 탓에 최고점을 받고도 결국 시시한 이유를 핑계로 실격 처리 되었다는 소문이어싿.
"호프만의 추천서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던 거야. 하나는 무명인 그를 오디션에 내보내 합격시키는 것. 그리고."
스미노프가 잠시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클래식 음악계가 그를 무시하거나 묵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반드시 추천서가 필요했던 거야. 완전히 다른 바닥에서 온 그를, 우리나 다른 선생들이 무시하려 해도 호프만의 추천서가 그걸 허락하지 않아. 그건 곧 우리나 전 세계 음악팬들이 추앙햇던 호프만을 부정하는 꼴이 되니까. 게다가 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스미노프는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 소년에게 정말로 탁월한 기술이 있어서 듣는 이를 열광에 바뜨린다는 점이야.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지."
미에코와 시몽은 꼼짝도 못 하고 스미노프와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쩌면 우리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게 아닐까?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갑자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미에코와 시몽은 동시에 움찔해싿.
"실례."
스미노프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받았다. 스미노프가 커다란 손으로 쥐니 휴대전화는 마치 핑거초콜릿처럼 작아 보였다.
"응, 하, 그래. 그런가."
스미노프는 한참 동안 소곤소곤 얘기하다가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이 궁금한 기색으로 쳐다보자 그는 전화기를 집어넣으며 설명했다.
"사무국이야. 가자마 진에게 겨우 연락이 닿았때."
"이제야?"
시몽이 무심코 시계를 봥싿. 이제 곧 날짜가 바뀌려는 참이었다.
"아버지가 양봉가라는 군. 생물학 박사 학위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도회지에서 양봉을 연구한다나 봐. 오늘은 파리 시청에서 벌꿀을 모으고 있엇다나."
"양봉가."
미에코와 시몽은 처음 듣는 말처럼 느릿느릿 그 단어를 되뇌었다.
"정말 다른 바닥이군."
시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를 진정한 '기프트'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있다.
지금 이 순간 세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문장을 읊는 호프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거라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