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곡
소년이 넓은 교차로에서 홛ㄹ짝 놀라 뒤를 돌아본 것은 자동차 경적 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대도시 한복판.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전 세계가 한데 어우러진 유럽의 중심지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국적도 다양하고 외모도 체격도 제각각.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행인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보인다.
각국에서 몰려든 단체 관광객이 줄줄이 지나가자 다양한 발음의 언어가 잔물결처럼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갔다.
그 안에서 인파의 흐름을 거스르듯 우뚝 서있는 소년은 몸집도 키도 보통이었지만 앞으로 한참 쑥쑥 자랄 잠재적인 '가능성'이 느껴졌다.
여너덧 살쯤 되었을가. 앳된 얼굴이다.
챙이 넓은 모자 면바지에 ㅏ키색 티셔츠, 거기에 얇은 베이지색 코트, 어깨에 큼직한 캔버스 천 가방을 비스듬히 메고 있다.
언뜻 보며 ㄴ어디에나 있을 법한 십대 청소년이지만 자세히 보면 묘하게 소박한 분위기가 있었다.
모자이 밑에 가린 단정한 얼굴은 아시아계지만 부릅뜬 눈이나 하얀 피부 때문에 국적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 눈이 허공을 해맸다.
주변의 소음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안는 것처럼, 고요함을 머금은 눈이 한 점을 바라보고 이썽싿.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옆을 지나가던 어린 금발 소년도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곧 어머니 손에 붙들려 끌려가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이는 아쉬운 기색으로 커다란 달가색 모자를 쓴 소년을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포기한 듯했다.
횡단보도 복판에 우뚝 서있던 소년은 신호가 바뀌려는 것을 퍼뜩 깨닫고 허둥지둥 달렸다.
분명 들었다.
소년은 비스듬히 멘 가방을 가다듬으며 교차로에서 들은 소리를 더듬었다.
꿀벌의 날갯소리
어렸을 때부터 귀에 익은, 절대 잘못 들을 리 없는 소리다
시청 부근에서 날아온 걸까?
무심코 두리번거리다 거리 한 구석에 있는 시계를 보고 자칫하면 지각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약속은 지켜야지
소년은 모자를 눌러쓰고 시원스런 걸음으로 달려갔다.
참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어느새 꾸벅꾸벅 졸았다는 사실을 개닫고 사가 미에코는 조금 당황했다.
순간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려 주위를 두리번 거릴뻔 했지만, 눈앞에서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소녀를 보고 아아 여기는 파리였지, 하고 기억해냈다.
물론 그럭저럭 경험이 있어 이럴 때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거나 등을 쭉 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졸았다는 사실을 들킨므로 조용히 관자놀이를 짚고 곡예심취한 시늉을 하거나 똑같은 자세로 있어 몸이 굳었다는 듯이 천천히 앉은 자세를 가다듬는게 상책이다.
솔직히 미에코만 그런 게 아니다. 옆에 있는 두 교수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옆자리의 알랭 시몽은 심각한 골초로 그렇지 않아도 니코틴 금단 증세를 보이고 있는데 지루한 연주가 이어지자 짜증이 샇여가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이제 곧 손가락을 덜덜 덜지도 모른다.
그 옆의 세르게이 스미노프는 거구를 테이블 위로 쭉 내밀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꼼짝 않고 곡을 듣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를 일을 끝내고 그 이름과 같은 술을 마시러 가고 싶을 것이 뻔했다.
그것은 미에코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은 물론이고 인생도 깊이 사랑하는 그녀는 담배도 좋아하고 술도 대단히 좋아한다. 일찌감치 이 고행을 끝내고 셋이서 이 오디션을 안주 삼아 느긋하게 한잔하고 싶었다.
전 세계 다섯 개의 대 도시에서 진행되는 오디션이다.
모스크바, 파리, 밀라노, 뉴욕 그리고 일본 요시가에.
요시가에 이외의 각 도시에서는 저명한 음악 전문학교 홀을 빌려서 오디션을 실시한다
"어째서 파리 담당을 저 세 사람에게 맡겼지?" 뒤에서 그런 혐담이 오간다는 것도 알고 있고, 실제로 미에코 일행은 그들 셋이 한 자리에 모이도록 뒤로 손을 썼다.
그들은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업계에서나 '불량아'로 통해쏙, 독설로 다져진 인연이었으며 일이 아니더라도 종종 폭음을 하는 사이였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의 귀에 자부심이 있었다. 세 사람은 소행은 다소 나쁠지도 모르지만 독차적인 연주와 음악을 폭넓게 허용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만약 서류 심사에서 떨어진 새로운 개성을 발견해낼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기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 사람마저 다소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정도로 오후부터 시작된 오디션은 지루했다. 처음에는 '괜찮은데' 싶은 아이가 두 세명 연달아 나오기에 기대했는데 그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긴장으로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채 나와 일생일대의 연주를 펼치는 젊은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스타'이지 '피아노를 잘 치는 젊은이'가 아니다.
후보는 전부 스물 다섯명이라고 들었는데 번호를 보니 겨우 열다섯 번째 연주자였다. 아직 열 명이나 더 남았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럴 때는 이따금 심사위원이란 새로운 방식의 고문일지도 모른다고는 생각이 든다.
순열과 조합도 아니고, 바흐, 모차르트, 쇼팽,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되풀이해 듣는 사이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애초에 훌륭한 아이, 뭔가가 빛나능 이는 시작하는 순간에 바로 알 수 있다. 개중에는 무대에 올라 선 순간 알 수 있다고 호언하는 선생도 있을 정도다. 분명 아우라를 지닌 아이도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들어보면 수준을 대강 알 수 있다.
심사 위원이 졸다니 무례하고 야속하다 싶겠지만 듣고자 하는 의욕이 이토록 넘치는, 인내심 있는 심사 위원들도 사로잡지 못한다면 일반 팬들을 휘어잡는 프로 피아니스트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역시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미에코는 옆 자리의 두 사람도 부녕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 했다.
3년에 한 번 개최되는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이번으로 6회를 맞이하낟. 세상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수도 없이 많지만 요시가에는 요즘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우승한 사람이 그 후 저명한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패턴이 이어졌기 때문인데, 새로운 재능이 나타나는 콩쿠르라는 의미에서 부쩌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지난번 우승자는 당초 서류 심사 때 떨어졌던 연주자였다. 요시가에는 서류 심사만으로 알 수없는 재능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1회 때부터 서류 심사 낙선자를 대상을 오디션을 열고 있는데, 그는 그 오디션에서 합격해 제1차 에선에 임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2차, 3차를 뚫고 본선에 남더니 급기야 우승까지 거머쥐었던 거이다. 더욱이 그 이듬해 세계 굴지의 피아노 콩쿠르인 S 콩쿠르에서 우승, 일약 스타가 되었다.
당연히 이번 오디션에도 기대가 모였다. 참가자들도 지난번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머릿속에 있어 운만 좋으면, 어쩌면 나도, 하고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지난번 우승자는 유명 음대에서 공부한 학생이었고 어려서 콩쿠르 경력이 없어서 떨어졌던 것 뿐이다. 실제로는 서류와 실력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어렸을 때 부터 철저한 레슨을 받아 두각을 나타내고, 저명한 교수를 사사했다면 될성 부른 떡잎은 업게 안에서도 이미 소문을 탄다. 또한 그런 생활을 견디지 못한다면 '될성부른' 떡잎이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혜성처럼 나타난 무명의 스타라는 건 일단 있을 수가 없다. 때로 거장이 일부러 숨겨놓는 경우도 있지만 소중히 키운 제자일수록 둥지를 떠나기 힘들다. 콘서트 피아니스트는 어중간한 신경으로는 해낼 수 없다. 중압감이 강한 콩쿠르를 전전하며 제압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가혹한 월드 투어를 치르는 프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기란 힘들다.
그런데 눈 앞에는 차례로 젊은이들이 나타나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 줄은 끝날 줄을 모른다.
기술은 최소한의 조건에 불과하다 음악가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운 좋게 프로로 데뷔해도 지속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저들은 어렸을 때부터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저 무서운 검으 ㄴ악기를 마주하며 보냈을까. 아이가 누려야 할 즐거움을 얼마나 참아가며 부모와 어른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왔을까
그리고 저들 모두가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 날을 머릿속으로 꿈꾸는 것이다.
너희 업계하고 우리 업계는 비슷하구나
문득 아유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친구인 이카이 마유미는 지금은 인기 미스터리 작가다.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고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잠깐 일본에 살았던 미에코에게는 몇 안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남미와 유럽을 오가며 자란 미에코는 당연히 균일화를 강요하는 일본에서
겉돌았고, 친해진 사람은 마유미 같은 고독한 늑대 부류뿐이었다.
지금도 가끔 함께 한잔하곤 하는데 그녀는 만날 때마다 문학계와 클래식 피아노의 세계는 비슷하다는 말을 한다.
봐, 비슷하잖아 콩쿠르와 신인상의 난립, 똑같은 사람이 인정받기 위해서 온갖 콩쿠르와 신인상에 응모하는 것도 똑같아. 그걸로 먹고 살수 있는 사람은 양쪽 다 극히 일부지.
자기 책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 자기 연주를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바글바글한데, 둘 다 사양산업이라 읽을 사람도 들을 사람도 한 줌밖에 안 돼.
미에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계적으로 팬들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젊은 팬의 확보는 절실한 과제다.
마유미는 말을 이어싿.
하염없이 키를 두드려대는 것도 비슷하고, 언뜻 보면 우아해보이지 않지만, 그걸 위해 평소 아ㅉ리하리만치 오랜 시간을 얌전히 틀어박혀 몇 시간씩 연습하거나 원고를 써야 해.
분명 하염없이 키를 두드린다는 점은 똑같다. 미에코는 동의해싿. 마유미의 목소리가 자학적인 톤으로 바뀌어싿.
그런데 콩쿠르도 신인상도 자꾸 늘어나기만 해 급기야 다들 필사적으로 신인을 찾지 이유? 둘 다 그정도로 지속하는게 어려운 장사라 그런 거야. 평범하게 하면 탈락하는 치열한 세상이니까 항상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해. 안 그러면 바로 관계자들이 줄어서 시장 자체도 줄어들어 그래서 모두들 언제나 새로운 스타를 찾는거야.
투입 비용이 달라, 미에코는 그렇게 반박했다. 소설은 밑천이 들지 않으니 괜찮지만 우리가 얼마를 투자한다고 생각해?
그 점은 안됐어, 마유미는 순순히 수긍하더니 숟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악기값, 악보값, 레슨비, 발표회 비용에, 꽃다발값에, 의상까지, 유학 비용에 교통비, 어, 또 뭐가 있지?
경우에 따라서는 대관료나 인건비도 떠 맡아야 하지. 시디 제작도 자비 제작에 가까울 때가 있고 전단지나 광고비도,
가난한 사람은 꿈도 못 꿀 장사야 마유미는 경악했다. 미에코는 실실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사지. 콘서트는 언제나 라이브고 언제나 여행지에서 새로운 악기를 만나, 피아니스트는 대부분 가는 곳곳에서 기다리는 여인들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해. 그러고보니 이 여인은 성감대가 어디였더라.,
의외로 까다로운 상대였지. 하고 똑바로 기억해뒺 않으면 두고두고 고생해. 다들 자기 악기와 함께 여행할 수 있는 다른 음악가들을 부러워해 . 뭐, 바이올린인아 플루트처럼 가벼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에 한해서지만, 커다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별로 부럽지 않거든.
둘이서 한 목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딱 한가지, 우리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게 있잖아.
마유미가 조금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음악은 통해, 언어의 장벽이 없어. 감동을 공유할 수 있어. 우리는 언어의 장벽이 있으니까, 음악가가 정말 부러워.
그러네.
미에코는 어깨를 으쓱해싿. 그 점에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그걸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전달되지도 않고, 글자 그대로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물며 그만한 투자를 하고도 결ㅋ노 수지가 맞지 않는 이 바닥에서, 일단 '그 순간'을 경험하면 그런 고생은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크나큰 환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렇다.
결국 누구나 '그 순간'을 원한다. 한번 '그 순간'을 맛보면 그 환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만큼 '그 순간'에는 완벽한, 지고한 경험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쾌락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몽롱한 머리로 계속 앉아 있는 것도 나중에 와인을 들이붓고 침을 튀겨가며 업계의 실태를 헐뜯을 것도, 헛수고로 밖에 보이지 않는 노력과 비용ㅇ을 투자해가며 젊은이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는 것도, 다들 '그 순간'을 원하고, 애타게 그리고,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서류는 이제 다섯 장만 남았다.
앞으로 다섯 명.
미에코는 지금까지 나온 후보들 가운데 누구를 합격시킬지 고민하기 시작햇다.
지금까지 들은 수준이라면 합격시켜도 된다고 확실히 말할 수있는 것은 한 명 분이었다. 또 한 명은 다른 두 심사 위원이 추천한다면 합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합격 수준에 못 미친다.
이럴 때 언제나 고민하는 것은 순서의 문제다. 처음에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던 후보들은 정말 괜찮았을까? 지금 다시 같은 연주를 들어도 그렇게 생각할까? 순서에 영향을 받는 것은 오디션이나 콩쿠르의 숙명이고, 순서도 실력이라고 냉정하게 생각하려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린다.
지금까지 일본인은 두 명 있었다. 둘 다 이곳 파리의 고등음악원에 유학하고 있는데 기술은 흠 잡을 데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다른 심사위원들도 추천한다면 합격시켜도 좋다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또 한 명은 안됐지만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기술이 이 정도로 엇비슷하면 나머지는 어떤 '신호'로 비교할 수바에 없다. 특출한 재능, 명확한 개성ㅇ 있는 아이라면 모르지만 합격선을 가르는 것은 아주 작은 차이의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신경 쓰이는 아이', '마음이 술렁거리는 아이', 눈길을 끄는 아이' 망설였을 때, 결국에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불확실한 감각에 의존하는게 현실이다.
콩쿠르에서 미에코는 자기가 순순히 '더 들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느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서류를 넘긴 순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진 가자마
미에코는 심사 전에 가급적 후보자 정보를 보지 않는다. 본인과 연주가 주는 인상만으로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서류에는 무심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프랑스어로 적힌 서류라 어떤 한자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인인 것 같았다.
사진에는 우아하면서도 동시에 야성미가 느껴지는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열 여섯 살.
시선을 빼앗긴 이유는 이력서가 너무 새하얬기 때문이다. 일단 읽을 게 거의 없었다.
학력, 콩쿠르 경력, 아무것도 없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라읏로 도항, 서류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
음악대학에 다니지 않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신동이 넘처녀나는 이 업계에서는 어렸을 때 데뷔한 연주자는 음대에 가지 않기도 한다. 오히려 성장한 다음에 연주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 음대에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
미에코가 그런 경우로 십 대 초반에 두 개의 국제 코웈르에서 2위와 1위를 거머쥐고 천재 소녀로 이름을 떨쳐 곧바로 연주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음대에 들어간 건 어찌보면 알리바이 공작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서류로만 보면 가자마 진이라는 소년은 연주 활동을 한 흔적이 없었다.
다만 한 줄, 현재 파리국립고등음악원 특별 청강생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특별 청강생? 그런 제도가 있었나?
미에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실제로 이 서류가 통과되어 지금 이렇게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오디션을 치르고 있으니 거짓말일리는 없었다.
그러다 구석에 있는 '사사한 인물' 항목을 본 순간,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 엉터리 서류가 통과된 이유를 알았다.
온몸이 훅 달아올랐다.
아니, 그렇지 않다.
미에코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 부분을 처음부터 보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잇었다.
유지 폰 호프만을 다섯 살 때 부터 사사
심장이 펄떡펄떡 온몸에 피를 보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그 점에 미에코는 더욱 동요했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정보지만, 그것마능로 서류 심사를 통과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건 잘 안다. 연주 활동 경력도 없고 음아갛ㄱ교에 다닌 것도 아니다. 실로 어디서 굴러온 돌인지 모를 존재인 것이다.
미에코는 옆에 앉은 두 사람에게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미에코는 후보자의 사전 정보를 전혀 보지 않지만 시몽은 '쭉 훌텅보는'유형이고, 스미노프는 '꼼꼼히 파악하는'유형이니 둘 다 이 정보를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추천서'라는 표시까지 있다.
유지 폰 호프만의 추천서! 이 사실을 알고서 두 사람이 펄쩍 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셋이서 식사했을 때 시몽이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로 꼼지락거렸지. 셋이서 오디션 전에는 후보자에 대해 일절 거론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말을 못 꺼낸 것이다.
입을 오물 거리던 시몽의 표정이 뒤늦게 뇌리에 뚜렷이 되살아났다.
그때, 그는 올해 2월 조용히 셋아을 떠난 유지 폰 호프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전설적이었고, 전 세계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들에게 존경받았지만 본인은 은밀한 장례식을 원해 가까운 이들끼리 냉큼 장례식을 치러버렸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어. 결국 두 달 후 기일과 같은 날짜에 음악가들끼리 모여 성대하게 고별식을 치렀다.
미에코는 리사이틀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모습을 찍은 디브이디를 받았다.
호프만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매사에 집착하지 안흔 호프만 다운 행동이었지만 그 고별식에서 숨을 거두기 전 호프만이 지인에게 남긴 말이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나는 폭탄을 설치해두었다네.
"폭탄?"
미에코는 그렇게 되물었다. 비밀도 많고 전설적이며 위대한 존재이기는 했지만 실제 호프만은 장난기도 많고 솔탈한 이물이었다. 그런데도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틀림없이 폭발할 게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탄이.
미에코와 마찬가지로 호프만의 친척들도 무슨 뜻인지 되물었다는데, 호프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고 한다.
미에코는 새하얀 서류를 보면서 초조함을 느꼈다.
시몽과 스미노프는 분명 호프만의 추천서를 보았을 것이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었을까?
흥분한 나머지 주위가 술렁거리는 걸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고개를 드니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스태프가 무대를 우왕좌왕 하고 있다. 가자마 진. 나오지 않은 건가?
미에코는 자기가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역시 이런 서류는 뭔가 잘못된 거야. 허풍이야. 추천서도 분명 뭔가 실수한 걸테지. 호프만도 말년에는 쇠약했을 터, 어쩌다 마음이 쇠약해져서 한번 추천서를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떤 걸거야.
하지만 무대 옆에 있던 스태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목청껏 알렸다.
"다음 후보로부터 이동에 시간이 걸려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를 마지막 순서로 돌리고 나머지 후보들로부터 앞당겨 연주하겠습니다."
객석이 조용해졌고, 순서가 앞당겨져 눈에 띄게 동요한 빨간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겁먹은 눈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뭐야.
미에코는 실망했다. 동시에 자기가 안도하고 잇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가자마 진. 대체 어떤 연주를 보여줄까?
"빨리, 빨리, 서둘러!"
겨우 넓은 부지 안 사무국에 도착한 소년은 수험표를 낚아챈 남자에게 이끌려 무대로 내몰렸다.
"저,저기, 손을 씻고 싶은데요."
험악하게 생긴 덩친 큰 남자의 뒤에 대고 소년은 모자를 움ㅋ녀쥐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대로 션ㄴ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무대로 내던질 기세여던 남자는 "참, 그렇지" 하고 화장실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서둘러, 옷도 갈아입어야 하잖아? 대기실은 저쪽이다."
"옷이요?"
소년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입을 헤벌렸다.
"저, 옷을 꼭 갈아입어야 하나요?"
남자는 소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다ㅗ 무대의상이 아니다. 설마 이런 차림으로 무대에 오를 셈인가? 다른 후보들의경우엔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도 많고 평상복이라 해도 재킷 정도는 걸쳤는데.
소년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일을 돕다가 그대로 달려와서, 일단 손좀 씻고 올게요."
소년이 태연히 펼쳐 보인 손을 본 남자는 깜짝 놀랐다. 마른 흙이 들러붙은 커다란 손은 마치 밭일이라도 하다 온 것 같았다.
"넌 대체......"
남자는 화장실로 달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지만 그 모습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아연히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혹시 뭔가 다른 회장하고 착각한 게 아닐까? 피아노 오디션을 받는데 흙투성이 손으로 온 사람은 처음 본다.
문득 불안한 마음에 수험표를 보았다. 혹시다른 자격시험의 수험표인 건 아닐까? 하지만 틀림없었다. 응시 서류의 사진과도 일치한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대에 나타난 소년을 본 미에코와 나머지 두 사람은 어이가 없었다.
어린애.
미에코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단어여싿.
그것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꼬맹이가 아닌가?
왁스 하나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신기한 듯이 무대와 객석을 열심히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이 자리에 너무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루한 클래식계를 깨부수겠다는 듯이 기세등등하게 캐주얼이나 펑크스타일로 등장하는 아이도 있지만, 눈앞의 소년은 어디로 보나 그런 부류가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아이이기는 했다. 그것도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각하지 못한, 자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움, 아직 성장기인 듯한 유연한 골격도 아름답다.
소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미에코 일행은 할 말을 잃고 무의식중에 얼굴을 마주 보았다.
"네가 마지막이야. 시작하렴."
보다 못한 스미노프가 마이크로 소년에게 말했다.
사실 후보와 대화할 수 있도록 마이크가 준비되어 이씨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오늘 마이크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네."
소년은 정신을 차린 듯 등을 반듯하게 폈다. 생각보다 힘차고 깊은 목소리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피아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년은 그제야 비로소 자기가 연주할 그랜드피아노를 시야에 담은 듯 보였다.
그 순간, 기묘한 전류 같은 충격이 공기를 타고 퍼졌다.
미에코를 비롯한 심사 위원들, 그들 뒤에 앉은 스태프들이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소년이 눈을 빛내며 살며시 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피아노를 향해 다가갔다.
마치 처음 만난 순간 한눈에 반한 소녀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그 눈은 열기를 먹므은 듯 촉촉했다.
소년은 서둘러서, 쑥스러운 듯이 피아노 앞에 우아한 동작으로 앉았다.
미에코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소년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건 분명 쾌락의 절정에서 볼 수 있는 표정이다. 방금 전 무대에서 멍하니 서 있던 소박한 소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에코는 봐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겼다.
뭐지, 이 공포는?
그 공포는 소년이 첫 음을 낸 순간, 단숨에 정점에 달했다.
미에코는 말 그대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 공포를 옆자리의 두 교수와 다른 스태프, 이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공기가 그 소리를 경계로 극적으로 각성한 것이다.
다르다, 소리가, 완전히다르다.
미에코는 소년이 연주하는 모차르트가 오늘 여태껏 질리도록 들은 것과 같은 곡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똑같은 피아노인데, 똑같은 악보인데.
물론 그런 경험은 이전에도 수없이 했다. 똑같은 피아노라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면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리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그렇지만, 이 아이는.
이토록 엄청나고, 이토록 두려울 데가.
혼란과 동요에 사로잡히면서도 미에코는 탐닉하듯 소년의 음색에 빠져들었다. 한 음이라도 놓칠까 봐 무심코 몸이 앞으로 쏠렸다. 까딱거리던 시몽의 손가락이 딱 멈춰있는 거싱 시야 끝에 보였다.
무대가 밝았다.
소년과 피아노가 맞닿아 있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부분만 어슴푸레 밝았다.
심지어 극채색의 찬란한 무언가가 저기서 일렁거리며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천진한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 누구나 필사적으로 모차르트처럼 천진해지려 한다. 무구하고 순수한 음악을 표현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무구함과 음악의 환희를 강조하려 한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연기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편안하게 피아노를 만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히 그것이 흘러나왔다.
저 풍부한 감성, 게다가 아직 여유가 있다. 이것이 저 소년의 최선이 아니라는 게 보인다.
엄청난 재능을 목격한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미에코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곡은 베토벤으로 바뀌었다.
현란한 색채가 변화하고 있다.
이번에는 속도를 느꼈다.
어떤 에너지가 오가는 듯한, 음악의 속도와 의사를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베토벤의 곡이 가진 독특한 벡터가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화살처럼 홀을 향해 튀어나오는 것이다.
미에코는 자기가 느끼는 바를 분석하고,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년이 내는 소리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고능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곡은 바흐로 바뀌었다.
세상에! 미에코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소년은 쉬어가는 마디 없이 세 곡을 연달아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한번 흐르기 시작한 물살을 막을 수 없듯이, 호흡처럼 자연스레 다음 곡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모두가 압도당해 홀린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홀은 완전히 소년의 세계에 지배당했고, 사람들은 쏟아지는 그의 소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커다란 소리
미에코는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색색거리며 고생하던 저 피아노에서 이토록 커다란 소리가 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소년의 커다란 손은 펴안하고 여유롭게 건반 위에서 춤추고 있다.
홀에 성스러운 대가람 같은 바흐의 선율이 강림했다.
놀랍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차곡차곡 쌓인 화성으로, 건축적으로도 완벽한 울림이 탄탄한 골격으로 다가왔다.
악마 같다. 미에코는 그렇게 생각햇다.
두렵다, 무섭다.
미에코는 격렬하게 동요했다. 하지만 요동치는 감정이 서서히 뜨거운 분노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꾸벅, 소박하게 목례를 하고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춘 후에도 홀은 스산할 정도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순간이 찾아왓다. 사람들은 달아오른 얼굴로 박수를 쳤고, 일어서서 환호를 했다.
무대는 텅 비어잇다.
방금 전 일은 꿈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스미노프가 거대한 몸을 흔들며 외쳤다.
"어이, 그 소년 좀 다시 불러와! 묻고 싶은 게 많아!"
"믿을 수가 없군."
시몽이 아연히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홀은 말도 못하게 소란스러웠다.
"왜 그래, 여기로 데려오란 말이야!"
스미노프가 고함을 질렀다. 무대 뒤는 혼란에 빠져 있어싿. 곧 덩치 큰 남자가 외쳤다.
"돌아가버렸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나가버렸답니다."
"뭐?!"
스미노프는 머리르 쥐어뜯었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우리가 나란히 점심때 먹은 파스트라미포크 때문에 환각이라도 보는 건 아니겠지?"
"정말 호프만의 추천서에 적힌 그대로야"
아연하던 시몽이 갑자기 미에코를 홱 돌아보았다.
"미에코는 안 읽었지? 말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지만 우리가 한 약속 때문에 말을 못 했어."
"용서 할 수 없어."
미에코는 중얼거렸다.
"어?"
시몽이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렸다.
"저런 거, 난 인정 못해."
미에코는 시몽을 노려보았다.
한 번 더 눈을 깜빡인 시몽은 그제야 미에코가 지독히 화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에코?"
미에코는 부들부들 떨면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용서 못해. 저런 건 호프만 선생님에 대한 끔찍한 모독이야. 나는 저 애 합격에는 기필코 반대하겠어!"
분노에 떠는 미에코를 시몽이 곤혹스러운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홀은 여전히 어지러운 흥분과 소란에 휩싸여 있었다.